참, 사람 향기 나는 사람...
광석...
그는 거절 하는데 익숙치 못한 친구였다.
밤에는 지인들과의 만남을 가져야 했고
다음날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예정된 concert에서 열창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곡을 쓰고 음반을 내고 가족들을 돌보고,
친구와 선후배들을 챙겨주었다.
해서 그는 나름대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만만치 않은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삼십이년의 짧은 인생을
결코 짧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바쁘게 살다가 간 것이다.
십여년전 그는 고대앞에'고리'라는 까페를 차렸었다.
까페이름을 '고리'라고 지은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사람과 사람. 인연과 인연을 연결시키는 고리역활을 해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는 대답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돈이 넉넉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독특한 냄새가 풍기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까페의 실내장식을 직접했다.
싸구려 소파며 조명등을 사다가 이렇게 저렇게 배치해보고
미술하는 친구를 불러서 간판을 만들게 하였다.
재능이 별반 없는 나는 소위 노가다를 통해 약간의 공헌을 했다고 자위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고리라는 까페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고
길지않은 기간동안 운영되었으나,
그를 아는 많은 이들에게 나눔의 따뜻한 공간이었다.
최소한 나에게는 분명 그랬다.
세월이 흘러 그는 직업가수의 길을 가게되었고
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인연의 고리는 묘한것인지 내가 들어온 회사의 여사원모임이
'고리회'라는 것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여사원회가 1년에 한번씩 주관하는
일일 고리자선찻잡에 그를 초대하여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되었었다.
예전에 고리라는 까페의 주인이 고리회가 주관하는 고리찻집에서
노래를 하게 된 기억이 난다.
"지가요 친구를 잘못 두었어요. 지가요 좀 비싼 놈인데요.
오늘은 공짜입니다. 제 친구 여기서 일을 하는데
석유개발을 한데나 어쩐대나..."
이제 더 이상 그의 넉살을 들을 수가 없다.
1990년 어느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 장가간다. 함 좀 져주라" 그래서 함을 져주었다.
행복하게 잘 살라고...
그러나 6년후 나는 벽제 화장터의 유골분쇄기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보내야 했다.
하루는 그의 공연 마지막날과 노래마을 사람들의 공연날이 겹친 일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광석이네 무리와 노래마을 사람들이
혜화동 정육점 2층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뒷풀이를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서른 즈음에'를 작곡한 승원이형에게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라니 어떻게 이런 노래를 만들어서
사람가슴을 아프게 합니까"라는 칭찬반 불만반의 이야기를 했었다.
광석이를 화장시키는 동안 승원이형과 형수에게 이 이야기를 또 해야 했고,
학전앞에서 치뤄진 노제때도 이 노래를 들어야 했다.
안된다고 이럴수는 없다고 외쳐보았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안다.
많은이들에게 이별의 처절함을 남기고 완전히 앞서서 갔다.
이제 우린 그저 그를 가슴한결에 고이 묻을 수 밖에...
- 1996년 1월 18일 최지열 씀 -
너무나 슬픈 목소리의 가객 김 광 석..
.....김광석과 필자와의 인연은 91년 필자가 연출하던 FM심야프로에
그를 디스크 자키로 기용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약 4년간 같이 방송일을 해왔고 타계하기전까지
PD와 DJ라는 공식적 관계를 넘어 호형호제하는 개인적 친분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음악에 관한 견해 이외에도
91년에서 95년까지 가까이서 본
인간 김광석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피력하는 것도
이제 고인이 된 김광석을 그의 음악과 더불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슈퍼맨, 김광석
김광석하면 가장 떠오르는 것이 그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이다.
그는 근래에 로드매니저를 잠시 고용한적이 있으나,
그의 활동기간을 통틀어 매니저 없이 거의 혼자서 모든 활동을 꾸려왔다.
그의 활동영역은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콘서트,
그리고 봄, 가을로 붐비게 되는 각 대학 축제등의 초대가수,
또 음반녹음, 방송 프로그램의 DJ,
기타 다른 방송활동이나 행사및 공연등에 초대되는 일들이었다.
이런 활동을 섭외나 홍보 그리고 스케줄 관리를 전담하는 매니저 없이
혼자서 처리한다는 것은 실로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김광석은 홀로 그일을 다해냈다.
그리고 왜 매니저를 두지 않느냐는 질문에 늘 이렇게 말했다.
"매니저를 둘만한 가수가 아니라서.."
그의 주된일과는 아침에 보통 방송사 한 두곳을 가서 녹음이나 녹화를 하고,
오후와 저녁에는 자신의 공연이나,
서울 혹은 전국의 대학이나 단체에서 초청한 행사에 응하고
밤에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를 진행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신문이나 잡지를 위한 인터뷰,
혹은 음반을 위한 녹음작업을 하고
새벽에는 컴퓨터통신을 통한 팬들과의 온라인대화나
작곡이나 작사 또는 연습, 혹은 독서에 몰두하는..
옆에서 보기 정말 대단하다싶은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보여왔다.
그는 선천적으로 자그마한 체구에 걸맞게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체질이었고,
주변에서는 흔히 그 성실함을 빗대어 슈퍼맨이라 불렀다.
여린 감성과 깊은 통찰력의 타고난 가수
김광석의 성격은 감성적으로는 상당히 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무척 강한 두가지 면을 동시에 보였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큼 철저함을 추구하였지만
주위에 관해서는 동시에 늘 관대히 대해왔다.
음반을 낸 초창기 형편없는 대우에
몇마디 불평만으로 막대한 이윤을 그대로 저버렸으며,
힘들게 살아도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의 노래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늘 자신의 삶의 방식과
그 해답에 대해 목말라 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보통젊은이 중의 한명으로서
우리들이 처한 이 시대상황에서의 작은 감정의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감정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려 애썼다.
그리고 잘 살려고 힘썼고, 늘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철저한 자기훈련의 결과로 매사에 깊은 통찰력을 갗춘 그는
자신의 여린 감성으로 이 타락한 세상과 결국 타협치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언제나 다정다감했으며,
바르게, 진정으로 착하고 올곧게 이세상을 살고자 했다.
늘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자로 예쁜 딸의 아빠로
그리고 좋은 후배로 선배로 친구로..
김광석 노래의 핵심은 [사랑]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동물원>등의 그룹을 거쳐
모두 6장의 독집앨범을 남겼다.
1989년에 '기다려줘'가 수록된 1집음반을 시작으로
'사랑했지만'이 수록된 2집이 1991년.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이 1992년에,
그리고 '일어나'가 수록된 마지막 앨범4집이 1994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1993년에 자신의 곡과 다른 가수의 곡을 리바이벌한
[다시부르기1]이 1993년에,[다시부르기2]가 1995년에 발표되었다.
따라서 김광석의 음악여정은 [노찾사]와 [동물원]의 그룹시절,
그리고 4장의 독집앨범 그리고 2장의 다시부르기로 나누어 볼수 있다.
[노찾사]나 [동물원]시절은 김광석 스스로 나이로나 음악적 연륜으로나
자신의 음악의 형성기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찾사]라는 그룹의 성격이 가지는 한계,
그리고 결국 아마추어적 성격을 버릴 수 없는
[동물원]이라는 그룹을 나와서
솔로 즉 전업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는 행위부터가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1집에서는 10곡의 수록곡중 6곡의 자작곡을 싣고 있는데
보컬(창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김광석 고유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정립이
아직 확고 하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큰 이유는 편곡을 맡은 연석원의 영향이
이 음반에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집에서는 연주곡1곡과 이장수가 작사한 '슬픈노래'에 곡을 붙인것 이외에
나머지 8곡을 모두 다른 작곡가의 곡을 수록했다.
이때부터 김광석 고유의 음악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조동익이 편곡에 가세함으로서 1집보다 훨씬 더
그의 노래를 심도있게 그려낸다.
그러나 김형석이 대중적인 편곡으로 만든 '사랑했지만'이나
'사랑이라는 이유로'같은 곡들은
훗날 김광석의 노래와는 음악적 스타일의 측면에서 구별된다.
'나의 노래'가 수록된 3집부터는
김광석 스스로 전적으로 앨범을 프로듀서하는
본격적인 김광석 음악의 시대가 열리는 시점이다.
오래전에 써두었다가 3집에서야 수록한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를 포함
'행복의 문'등을 수록,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발표한 앨범이다.
그리고 '일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수록된 4집은
이제 담담히 희망과 좌절을 관조하며 삶을 노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본격적인 포크, 컨트리적 스타일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4집음반과
다시부르기 1.2집은 예전 앨범과 달리
김광석 고유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은 앨범들이기도 하다.
특히 다시부르기 2는 경지에 이른듯한 보컬과 포크와 컨트리
혹은 블루스의 흔적까지 엿보이는 음악적 성숙도가 깊은 앨범이다.
선곡에 있어서는 다시부르기 1이 동물원시절의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나 노찾사 시절의 '광야에서', '그루터기'등
자신의 예전곡들을 중심으로 했다면,
다시부르기 2에서는 한국대중음악사에서 그 생명을 아직 잃지 않는 곡인,
한국 포크의 정신이 담겨진 '바람과 나',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등의 노래를
과감히 리바이벌하여 김광석 스스로의 음악적 방향의 확고한 설정과 더불어
앞으로의 새로운 영역과 음악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큰음악적 변화기의 단계에 다다른 상태를 보여주었다.
김광석은 생리적으로 포크적 성향을 많이 가진 음악인이었다.
그의 음악자체가 통기타 하나만으로 구성되는 점에서
자연스레 그의 음악이 포크에 가까울 수 있는 점도 있지만,
김광석의 심성자체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한국화된 장르
즉 70년대 김민기, 조동진, 한대수등의 포크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포크적 성향위에 김광석은 늘 컨트리와 블루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포크음악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메세지송의 전유물이었다면,
김광석은 자신의 음악적 심화를 컨트리나 블루스
특히 '블루 그래스'나 '힐리빌리'등의 음악에서 찾으려 했다.
(생전에 내쉬빌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컨트리 풍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물론 김광석의 음악감상의 폭은 재즈에서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음악적 방향은 컨트리나 블루스였을 것이다.
그것을 예시한 음반이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된 다시부르기2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음악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김광석 노래의 주제는 늘 사랑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그다지 원만히 대해주지 않았고,
그는 늘 처절한 사랑의 아픔으로 속을 삭였다.
그리고 노래로 표현했다.
[잊음]에 대한 그의 열망은 1집에 '내꿈', '슬픈 우연'에서,
2집의 '너 하나뿐임을', '슬픈노래',
3집의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 '행복의 문'으로
그리고 4집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유롭게'등
직접 곡을 쓰거나 가사를 붙힌 곡들에서 계속 이어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잊음의 고통과 더불어
'나의 노래'나 '일어나'같은 희망찬 노래들을 동시에 부름으로서
그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결국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자 했다.
그의 노래에 그리고 그의 가슴에...
행복하세요..
김광석은 방송때나 헤어질때나 그리고 사인을 할때에
늘 쭈글쭈글 웃으며 '행복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얼마나 그가 행복에 대해 갈망했으면 그다지도 외쳤을까.
그는 늘 진솔하게 인생을 살고자 했고,
무엇보다 솔직한 삶을 노래하고 노래를 통해 삶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힘의 원천이 자신의 노래로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 왔다.
그러나 그 무엇이 그의 노래로도 치유될 수 없었는지..
김광석은 무척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다.
그의 노래를 다시 한번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슬픈목소리를 가진 가수였는지...
김광석은 마치 그의 인생처럼이나 슬픈 목소리를 가진 가객이었다.
- 구경모<불교방송PD> -
광석아..
오랜만에 내 방 책상위에 앉았다.
컴퓨터에도... 악기위에도..나의 한가로움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고..
1월 22일. 오늘이 너의 생일인데
같이 밥먹고 술 마시고 당구도 쳐야 하는데...
벌써 16일이 지났구나
문득 니가 없음에 익숙해져가는 나를 발견하며...
그게 서운하고... 미안하고... 또 허무해...
너의 그 주름진 웃음... 파계승 같다던 짧아진 머리...
독수리 발톱같던 오른손톱...쳐진 어깨...
흙 내음나던 목소리... 휘적이던 걸음...
내 무딘 기억력이 얼마동안이나 잡아둘 수있을런지
몇일전 내꿈에 찾아온 네 모습
너의 맨발이 시려 보였어. 그 파란 트레이닝 바지도.
무슨말을 하려 했는지...
연극 같았던 너의 마지막 모습. 이제야 새삼 네가 이 곳에 없음이 느껴져.
부디 좋은 곳에 있길...
1996년 1월 22일 새벽 4시 47분
- 학기가 -
**오랜날들이 지난뒤에도...
그대, 무엇을 꿈꾸었기에
어느 하늘을 그리워했기에
아직 다 부르지 못한 노래 남겨두고
홀로 먼길을 떠나는가.
다시 날이 밝고 모든 것들이 깨어나는데
그대는 지금 어느 구석진 자리에 쓸쓸히 서서
무얼 바라보고 있는가.
고운 희망의 별이었는데
이 형편없이 망가진 인간의 세상에서
그대의 노래는 깜깜어둠속에 길을 내는
그런 희망의 별이었는데
그댄 말없이 길을 나서고
우린 여기 추운 땅에 남아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 거냐
도대체 무얼 노래해야 하는 거냐
알것같아, 그대 말하고 싶었던 게 무언지
그대 온 몸으로 노래하던 그 까닭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 청춘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들려 들릴거야
그대의 기타소리
대숲의 바람처럼 몸을 돌아나오던
그 하모니카 소리
우리 고단한 삶에 지쳐 비틀거릴 때마다
우리들 마음속에 소용돌이칠 그대의 노래
우리들 팍팍한 마음속에 뜨겁게
울려날 그대의 목소리
어느날 영롱한 나팔꽃처럼
환히 피어날 그대의 노래
그대는 그렇게 우리들 탁한 삶의 한켠에
해맑은 아침으로 따뜻한 햇볕으로
남아있을테지
다시 겨울이 오고, 오랜 날들이 지난뒤에도
- 백 창 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