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국내좌익세력들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끈임없는 왜곡중에 대표적으로 친일과 군사독재자 그리고
유신통치,지역감정유발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친일왜곡에 대한 진상 그리고 군사쿠데타와 유신 독재주장 및 굴욕회담 한일협정,베트남파병에 대한
비판, 지역감정유래,용공조작설,노동자 농민 탄압,영구통치설 등등에 대한 반박과 박대통령의 업적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조명한
글들입니다.
--박정희 친일왜곡의 진상 및 박대통령에 대한 평가--
먼저 노사모 위시해서 국내 좌익세력들이 인터넷에 퍼뜨리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대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좌익과 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뿐만
아니라 경찰 및 언론도 친일이고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느냐?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인이란 직업에 대한 호감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또한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평소에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일본에 대해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도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김종신씨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대 군인이란 직업에 대한
호감과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 때문에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 힘들어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 문경소학교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길밖에 없다.
앞으로 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지난번 민족문제연구소가 자행한 친일파인사명단발표는 어느 직책 직위 이상이면 무조건 반민족 친일파란 논리인데(군인은 소위 이상
경찰은 경사 이상 관료는 고등문관 이상으로 대상을 제한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선친들을 뺀 친일파명단발표을
위한 것이며 박정희 대통령(소위)을 정치적 목적으로 넣기 위한 술책이라 보여지기 때문에 우리국민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의 최일선에서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의 문헌 사료를 친북 좌익들이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말로 둘러대는 것이 바로
연변학계,연변자료 어쩌구 하면서 공갈치는 것입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대통령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대통령이 소학교 교사로 근무할 당시에 신념을
가지고 한 민족교육 및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이기청씨가 밝힌 만주군시절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몰래 빼돌린
일화등...)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좌익세력들이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무장 독립투쟁 단체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조선인 공산유격대조차 없었지요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를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정권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여러분 팔로군이 뭘까요? 팔로군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한마디로 모택똥이의 팔로 빨갱이 공산군이였습니다. 팔로군은
모택동이 장개석의 국민군에게 박살이 나자 마침 일어난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중국공산군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본래 명칭은 홍군이라 불림) 모택동의 팔로군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고 주장하는것은 소련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는 논리와 똑같습니다, 더욱이 아시다시피 팔로군은 중국통일후에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6.25때 국군과 연합군을 공격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한국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바로 그 중공군입니다. 팔로군이 독립군이라면 모택동은 독립투사입니다. 이젠
고구려역사를 갖다바치는것도 모자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더니 중국 공산군이 대한민국 독립군이라고 주장합니다. 더욱이 팔로군은 우리 임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독립투사들조차 공격해서 상당수를 죽여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조선의 해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 세계 공산화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박정희는 한때 빨갱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에 과거 남로당 사건에 연루된 것에 대해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 70년 7월에 김종신씨에게 말하죠.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되는 분(이재복)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그분이 자꾸 청하길래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 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여순반란사건 때(48.10월), 박정희 소령은 반란군 진압차 광주에 갔다 왔으며, 11월 남로당 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위 내용의
자술서를 쓰고, 당시 그 이재복과 같이 간 장소에서 본 남로당원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좌익활동이라는
것에는 하나같이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활동은 커녕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도, 도장도 없고, 당적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은 것은
이재복의 가진 명단속에 박정희란 이름인데, 이것으로 빨갱이라 몰아붙일 수 있을까요? 능력이 뛰어나서 포섭 물망에 오른 것이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겠죠.
설사 활동을 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사람을 배신자, 기회주의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대로
남로당에 남아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 했었어야 된다는 얘기일까요? 배신자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어디 소속들이길래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불분명하며 어쨌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군대지휘관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으면 임무를 잘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광복후 일본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의 내연녀였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 노대통령처럼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미국가서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굴욕적 한일협정체결~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
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권을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참고-韓日 독도 공동소유 美제안, 박정희가 거부"
1965년 박 전 대통령이 일축 ,,, 미 국무부 외교문서 확인
신용일 기자
한일협정 당시 독도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자 미국이 협정 체결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일 공동운영 등대를 독도에
설치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은 363호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1965년
5월17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했다.
이튿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양국이 독도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 운영 등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있을 수 없는 일(Just would not work)’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비가 한일협정 타결로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독도문제가 협정 타결에 장애물로 대두하자 독도에 이같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로버트 W. 코머 미 국가안보위원이 1964년 5월19일 존슨 대통령과 특별보좌관 등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코머는 “우리는 한국민 2,000만명을 위해 연 3억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떡하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일본돈이 한국으로 유입돼 주한미군 주둔경비가 감소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정이 성사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
존슨 행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를 한일협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은 1965년 6월15일 윈트롭
브라운 주한 미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364호 문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브라운 대사는 문건 364호에서“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계속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면 장관급 회담은 무의미하다.
만일 일본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김동조 대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기에 그같은 회담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일본과의 협정 그 어느 곳에라도 독도가 언급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명백하다”고 재확인했다.]
돈 몇푼에 우리땅 독도를 폭파할려고 했다고 국내좌익세력들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음해를 자행해왔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미국과 일본의 큰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 우리땅으로 지켰습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박정권이 개인청구권을 팔아 먹었다는 것은 잘못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장면정부부터 입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죠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구체적으로 철저하게 피해보상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 시기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병자
비일비재하는 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를 부관참시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통의 승리라고 할수밖에 없슴)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통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60년대 호남사람들이 선거때 박정희대통령한테 50프로 이상 표를 준 사실을
아십니까?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5.16은 쿠데타가 아닌 진정한 혁명이다-
박정희는 원래 만주군관 학교 출신이고요. 거기서 수석 졸업을 해서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도
박정희를 두고, 일본인을 이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의 자랑으로 여겼죠. 무슨 친일파니 매국노니.. 그따위 평가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손기정 선수 아시죠?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주잖아요. 그래도
조선인들은 조선인이 왜놈들 보다 잘나서 조선인의 기상을 보여줬다고 떠받을었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박정희는 일본군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하급장교로서 근무했으며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만주국은 일본국과는 좀 다른 나라였죠. 뭐~
괴뢰국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먼저 독립군 토벌 광복군 토벌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근거 없는 날조이고요. 천황 혈서 충성맹세 같은 것도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특히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측에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중의 창씨개명이 도요다 다이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정치공작도 쏙 하고 들어가버렸지요. 당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 80% 이상이 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부친도 했었던 것이고요. 별로 친일이니 매국의 증표가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5.16은 정변이 아니라, 명백한 혁명이고요. 당시 윤보선, 장면 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절정을 달렸는데.. 박정희가 빈농의
아들인 것에 반해 윤보선은 친일명문벌열가문 출신이었고요. 장면도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반민특위가 작성한 친일파 살생부 268인 중에 한명으로
등재된 악질 친일파였죠. (박정희 해당없슴)
4.19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이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데... 비참한 민생은 내팽계치고 10번도 더 개각이 이뤄지죠. 이유는 바로
장관 자리 하나씩 해 먹으면 가문의 영광이요,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처럼 코드정치다, 보은인사다.. 하면서
전부 다 해 처먹었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합니다. 5.16으로 인하여 장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진짜 친일파 정권이 무너지게 된거죠. 그런데 왜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냐고요?
당시 4.19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회가 5.16 지지성명을 발표하죠.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서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며 칭찬하게
되죠. 이처럼 학생, 대중, 지식인 너나 할 것 없이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4.19 정신의 계승이라 칭송했습니다. 군사정변???
5.16때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대규모 교전도 없었죠. 그래서 5.16을 무혈혁명이라고 합니다. 즉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불순한 무리들은 5.16을 폄하하며..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 혁명공약을 내걸어 모두
완수하고, 민정이양을 거쳐 직접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됩니다. 당시 서민이었던 박정희와, 친일벌열가문의 후예인 윤보선이 경합을 벌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게 되죠. 즉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박정희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통치설은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반박정희 세력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유가족인 박근혜씨의 증언을 올립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조차 못했던 자식으로서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께서 여한없이 눈을 감으셨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여한이 없으리란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그 무렵 국가를 위한 자신의 설계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셨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끝은 우리 겨레의 5천년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떻게든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이루어 가난과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조직적인 방해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으며, 우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이 생겨 북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78년 9월26일 우리 힘으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일곱번째의 보유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그날 쓰신 일기를 보면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작업이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여러 번 “최총리가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의 경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81년까지는 핵개발과 정부이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나라는 혼란없이 선진국 대열에 섰을 것입니다."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고노동,저임금같은 노동권의 취약성과 환경권관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초기 산업개발 당시부터 개발 우선 정책집행
과정상 당면한 고노동 저임금 및 반환경적 요소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쉽게 간과했고 넘어갔다면?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내수시장이 열약한 상태에서 수출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태에서 기술도 없고 자본도
별로 없는 초기 개발 단계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는 상식적으로 많지 않고 선진국보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제한적 선택일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겯제개발이 바로 노동자 억압으로 주장하는 지금 좌파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저노동 고임금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천연자원과
산업자본의 취약성을 극복해 짧은 세월안에 산업화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선모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발산업국가도 후발국가도 산업화과정에서는 모두 고노동,저임금이었고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적절한 노동과 임금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척된 이후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가의 노동복지정책 즉 국가환경정책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이 그간의 세계사이며 환경권도 마찬가지이다.
더우기
경제개발시대 공무원 및 기업가들의 유착과 연결된 반노동권적 정책 집행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부재와 결여에서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까지 모두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과연 노동자 농민의 희생뿐인가?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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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자유주의연대 |
날짜 : 2005-04-28
10:34:36 |
조회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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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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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
(이한수기자
hslee@ |
-국내좌익들이 펌하한 새마을운동 세계가 배운다.-
중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3년간 3만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론 공무원 35만명을 한국에서 硏修연수받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엔 후진타오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31개 省성·市시 간부 200명과 일주일 合宿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했다. 중국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농민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都도·農농격차로 고심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 새마을운동이 낙후한 농민·농업·농촌의 ‘3農농문제’를 극복해낼 정책 모델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농촌부흥운동을 배우기 위해 몽골,베트남,라오스,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새마을 관련조직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연수받고 돌아간 각국 공무원과 농민이 160여개국 4만명에
이른다. 북한 김정일조차 새마을사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깥 시각은 이런데도 정작 나라 안에선 새마을운동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置重치중했다’고 쓴 근·현대사 교과서를 토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교과서가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성공적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중국의 開放개방과 발전 지향의 사회주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한국 守舊수구 左派좌파의 눈엔 거꾸로 보인다는 말이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첫해인 1970년 3만5000개 마을에 335부대씩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마을길 넓히고 다리 세우고 창고를 지으라고
장려했다. 이듬해엔 성과가 좋았던 1만6000곳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나눠줬고 성과 없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경쟁을 통해 농민들의
마을 살리기 의욕을 북돋운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해가며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라고 해서 곳곳에 국민 稅金세금만 뿌려대는 이
정권과는 달랐다.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운 새마을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 그걸 디딤돌 삼아 압도적 경제력으로 한국시장에 밀고 들어올 때 ‘새마을운동
깎아내리기’에 골몰했던 사람들은 모두 꽁무니를 내리고 시치미를 뗄 게 분명하다.
--누가 과연 민주화에 진정한 공헌자인가(무궁화) ---데일리안토론방
흔히 말하기를,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영삼 김대중은 민주화 투사라고 부른다.
이거 완전히 새빨간 거짓 선동이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박정희를
독재자로 몰아세우면서,
자기들이 민주투사인양 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살았었고,
내 눈으로 똑바로 박 대통령을 보았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살았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동네 이장일을 보았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시골 농번기가 되면
어김없이 시골 농촌에 내려 와서는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막걸리를 즐기셨다.
농번기가 되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집에 모였었다.
그리고는 동네 어른들은
면장, 군수를 찿아다니면서
이번 농번기에 꼭 우리 마을에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자고 하였다.
당시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의
농촌부흥 운동으로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농촌 마을은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다.
만일, 박 대통령이 정말 독재자였다면,
과연 당시 농촌 농부들이 이토록
박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 하였겠는가?
나는 1970년대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 모대학에 다녔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중화학, 중공업이 집중 육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은 세계 최하위 빈곤국가에서
우리가 중진국 진입이라는
희망과 꿈에 벅차 있었다.
대통령과 국민은 하나가 되어
꿈과 희망을 안고 열심히 일만 하였다.
자칭 민주화 투사들은 말하기를,
"70년대에 유신헌법은 유신독재체제"라고
비난하고 있다.이거 또한
거짓된 민중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유신헌법 체제 동의는
전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 하였다.
우리는 유신체제로 인해 더욱더 중화학, 중공업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희망을 낳게 되었다.
우리는 80년대가 가장 호황기 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80년대에 꽃피운 시기는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 개정통과로 인한 경제개발 덕이었다.
만일 당시 유신헌법의 개정 통과가 불발로 끝나고,
자칭 민주화 투사란 분들이 집권 하였다면,
우리나라는 끔찍한 상황이
이미 일찌기 발생하였을 것이다.
70년대에 대학가는 연일 데모로 얼룩져 있었다.
여기에 선봉에 선 자가 김영삼, 김대중씨였고,
김대중씨가 특히 심했다.
김대중씨는 대학가 강단에 서서
당시 학생들에게 민중선동을
일으키면서 학생운동에 불을 놓았다.
당시 김대중씨의 수제자들이
현재 집권 열우당의 실세들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에게는 이들 데모만
주동하는 학생들을 너무 싫었다.
학교는 툭하면 휴강 하였다.
당시 모범 대학생들에게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말을 빌려보자.
" 저 개XX들, 또 데모질이다"
"저 개XX들중에는 어떤놈들은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이란 책을 숨어서 몰래 본다고 하더라"
"저 개XX들 하고는 말도 하지 마라"
일반적으로 70년대는 민주화 투사가 독재자와
맞서 싸운 얼룩진 시기라고 교육을 하고있다.
이것은 철처히 오도된 잘못된 교육이다.
자칭 민주화 투사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는
자기들을 미화하기 위한 위장선동에 불과하다.
당시 나는 박 대통령 시절에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내 눈으로 박 대통령을 똑바로 보았었고,
당시 상황을 진실되게 말하는 것뿐이다.
박 대통령은 절대로 독재자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우리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이끈 훌륭한 대통령이시고,
우리 국민들을 절대로 억압하지 않았다.
단지, 당시 박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몰두하고 있을때,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으면서
민중선동을 일으키며 데모만
주동하였던 작자들만 탄압을 받았었다.
특하면 좌익들이 그땐 총칼로 사람들을 막 죽였다고 젊은애들을
속이지만 박정희가 살인마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간 사형언도 받은 숫자는 48명으로
1년에 3명이 체안된다. 전부 극악한 흉악범들 아니면 남한체제 전복을 기도한 역도들이였다
그렇다면 자칭 민주화 투사인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를 방만하게
운영하면서 IMF 사태를 초래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 체제하에서,
IMF 조기졸업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미명하에,
외국자본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우리기업을 외국에
헐값으로 팔아 버렸다.
작금의 외국인들이 우리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
IMF 체제하에 무려 170만명의 가장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 몰렸다.
한 가정이 4인임을 감안할 때 무려 700만명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달래 줄 것인가.
무책임한 돌파리 의사가 주사나 약 처방을
과도하게 남발한 것이였다.
김영삼, 김대중씨는 나라를 집권하면서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로 얼룩졌었다.
최근에는 국정원의 도청 비리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들이 나라를 위한 진정한 민주투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부도나게 하였지만,
이 분은 반공이념이 투철 하였다.
그래서 당시 안보는 불안하지 않고,
국민들이 그런데로 마음 졸이지 않고 살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나라가 위기로
치달을 시 금융개혁 입법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여야 대권주자를 비롯한
정치권이 개혁시도를 방해 하였다.
결국 우리나라는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당시 정치권은 썪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간첩 한마리도 안 잡고,
더구나 북한이 남한을 향해 뚫어놓은
땅꿀조차도 발견하지 않았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이 안보 불안으로 국민들이
너무나 고통을 겪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부패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혹시 부정에 개입할지도 모르는
친인척을 엄중하게 감시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친형은 가난한 농부로 여생을 보냈고,
친 누님은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또한 가난하게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청렴결백한 생활을 하였다.
박 대통령의 침실 화장실에는
물을 절약하기 위해,
벽돌 한장을 놓고 살았다.
또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때 보니,
20년된 다 떨어진 혁띠와
손목시계를 차고 계셨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자,
전국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당시 나는 시골 농촌에 가보니,
할머니들이 정화수 물 한그릇을 떠 놓고는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또 빌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당시 전국에 농촌의 할머니들은 다 이랬다.
그래서 당시 일간지 신문에도
이런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씀하셨다.
"민주화는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고, 잘 살게 될때
진정한 민주화가 성숙될 수가 있다"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나라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에
선진국 진입을 꿈꿀수가 있었고,
이로인해 중상류층이 두터운 층을 이루게 되었다.
두터운 중상류층으로 인해
우리는 자연히 민주화를
이룩할 수가 있게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이어지며서
우리나라는 나라경제가
힘을 잃으면서 중상류층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중상류층의 몰락은
경제민주화를 몰락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 민주화에 공헌한 분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란 말이더냐.
우리는 최소한 세상을 똑바로 알고 살자.
제발 거짓 선동꾼에 속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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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유신을 함부로 말하는가?--
현재 열우당과 그 추종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평가할 때 현재의 가치기준밖에 적용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가히 단세포적인 두뇌를 가진
집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여 나약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현 세대들을 세뇌하려는
모리배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정치가들이 '유신'을 악의 대명사처럼 폄하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신헌법'이란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을 총칼로 겁박해서 강제로 통과시킨 대악법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칭 '민주투사'라는 사람들은
'유신독재'란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다.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유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가령,
60-70년대에 버스안에서 어떤 어르신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치자. 그 당시에는 유쾌하진 않았을 지 몰라도 그것을 아무도 이상하거나 잘못된
걸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젊은이가 '아저씨, 버스에서 담배피우시면 안됩니다'라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용기있는 사람이다. 현재의 잣대로는 아무리 나이드신 어른이라도 버스안에서
담배피운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신통치는 독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독재'란 것은 국민의 의지에 반하여 통치자가 강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좋은 예이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해서 국민을 겁박하고, 불리한 지역에서는 투표를 방해하고,
투표함 바꿔치기 같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1972년 11월에 실시되었다.
투표인명부에 등재된 투표인수는 15,676,395인 이었고 이중 91.9%에 해당하는 14,410,714인이 투표에 참여하였으며, 이중 찬성이
91.5%에 해당하는 13,186.559표로서 유신헌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세상에서 국민의 90%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권에 대해 '독재'라고
매도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지 않을까? 집권후, 10년간 자유당 잔재를 청산하고 5000년 유산인 가난을 몰아내준 지도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였더란 말인가?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전선에서
피땀흘려 일하며 세계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 칭송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
직업도 없이 민주화운동 한답시고 국가에 저항하고 감옥이나 들락거리든 사람들을 국민들은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자칭 '민주투사'란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 것이 무엇인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물론 국민소득 1만불 시대인 현재의
상황에서는 유신통치와 같은 형태가 허용되기 어려울 것이란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재야운동가들 중에 인정받아야할 분도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을려면 박정희 대통령과 그 당시 산업전선에서 묵묵히 일하셨던 분들을 먼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불행히도, 열우당과 민노당의 자칭 '민주투사'들은, 극소수에 속했던 자신들의 생각은 옳고 대다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틀렸다는 아집과,
피해의식에 따른 보복심리로 과거사 전체를 부정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들인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에겐
박대통령 시절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평가도 금기시 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잣대로만 역사적 사실에 대해 평가하려는
외눈박이들은 역사를 논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세월이 갈수록 그 당시에 사셨던 분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진실을 말해줄 분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점이 심히 유감스럽다. '유신'이란 것이 현재 정권을 잡은 모리배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헌정질서를 유린한 악이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에 두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분명한 사실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있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에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90년대말 경제위기 때 재야운동권의 큰 어른이신 백기완
선생의 말씀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나같은 사람은 핍박했어도 나라전체는 잘살게 해줬는데 지금 이놈의 정권은 뭐하는 집단인지
모르겠다.' 불행히도 권력에 눈이 먼 작금의 열우당 시종잡배들에겐 자신들이 가장 존경했던 어른의 말씀조차도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고
있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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