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8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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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번호 생성일 배포일 분류 출처
07SEOUL35752007-12-19 09:212011-08-30 01:44기밀서울대사관

제목 : 이명박 당선자는 어떤 사람인가?

  • 기 밀 SEOUL 003575
  • 국방부망 배포1)
  • 국방부망 배포2)
  • 행정명령 12958: 비밀해제: 12/10/2014
  • 태그: KN3), KS4), PGOV5), PREL6), PINR7)
  • 제 목: 이명박 당선자는 어떤 사람인가?
  • 참조: 가. SEOUL 02539 나. SEOUL 02800 다. SEOUL 02960 라. SEOUL 02652
  • 분류자: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 근거 1.4 (b,d).
  • 번역자: PoirotKr (트위터 사용자명) — Micheal H. Rhee 2011/12/25 10:14

요점

1.(기밀) 요점: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은 자수 성가한 실업가이며 정치가이다. 현대건설 대표이사와 서울시장으로써의 성공적인 경험은 한국 제7대 대통령으로써 많은 것들을 달성하리라고 많은 이들을 믿게끔 만들었다. 가장 철저한 검증을 받은 대통령 후보이며, 이명박은 국법을 다소 안일하게 해석하며 산 인생인데, 이 점은 자유 분방한 1970년대나 1980년대 한국의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명박은 자신의 수상적은 사업거래들은 다 지난 과거라고 주장하고있다. 이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2월 14일에 자신의 거주지를 빼놓고 모든 자신의 재산을 한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명박의 거렁뱅이에서 부자로 탈바꿈한 그의 인생이야기는 이미 2개의 TV 시리즈로 만들어진 바 있다;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2월 25일에 취임하는 그가 어떤 대통령이 될 것인지 어느 정도 통찰력을 제공할 것이다. 요점 끝.

배경

2.(민감하지만비분류) 한나라당 후보 이명박은 1941년 일본에서 출생했고, 그의 가족은 해방이후 한국으로 이주했다. 이명박의 가족은 전후의 기준으로 봐도 극심하게 가난했고, 이명박은 종종 가난이 오늘날 자신을 만들어준 하나의 요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7명의 자녀 중에 다섯째인 이명박은 어린 시절부터 대학시절 내내 자신의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해야 했다. 이명박은 고려대학 학생회장으로 친 민주주의 시위에 참여했는데 이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려야 했다. 이명박은 폐병으로 인해 군대복부를 면제받았다. 1965년에 현대건설을 입사한 이후, 그는 35세에 사장이 됬고, 46세에 회장, 그리고 1976년부터 1992년까지 최고경영자로 근무했다. 현대에 있을 당시 이명박은 까다로운 기업체 간부로 유명했으며, 그는 또 현대 창업자인 고 정주영이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했었다고 종종 자랑하곤 했다.
3.(기밀) 이명박은 1992년에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비례대표자격으로 정치에 처음 입문했다. 국회에서 평범한 임기 이후에, 그는 서울 중심부의 명망있는 종로 지역구로 출마했다. 그 선거전에서 이명박은 노무현 대통령을 패배시켰다. 그는 선거자금법 위반으로 인해 1998년에 바로 그 지역구 의원직을 상실했으며, 사임이후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객원 연구원으로 1년을 보냈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서 2002년에 시장에 당선되었다. 측근 보좌관에 따르면, 이명박은 1990년대 말 이래로 청와대를 자신의 목표로 삼았고 더 많은 전국적인 인지도와 경험을 쌓기 위해 시장에 출마했다.
4.(민감하지만비분류) 2002년에서 2006년까지 서울시장일 당시, 이명박은 야망찬 많은 사업들을 출범시키고 감독했는데, 그 중에 주요한 내용은 심각히 오염된 상태로 1960년대 이래로 고가도로에 의해 뒤덮여 있던 서울의 번화가에 자리한 청계천 환경복구; 서울시청 앞에 잔디광장 건설; 버스노선 체제의 능률화; 그리고 서울 숲의 개장 등이다. 이들 사업들 중 특히 2005년에 재개장된 청계천 사업은 서울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이명박이 서울 시민의 삶의 질 개선에 헌신하는 환경 생각하는 지도자로 명성을 쌓게하는데 도움이 됐다. 현대 건설의 최고경영자로 그리고 시장으로 그는 “불도저 리”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그의 업적들과 거대 건설사업에 대한 애착 덕분이다.

외교 정책

5.(민감하지만비분류) “MB 독트린” 라고 불리는 이명박의 일단의 외교정책은 다소 모호하지만 분명히 보수층 견해를 반영한다. 이명박은 외교정책이 국가의 이익에 바탕을 둘 것이며8) 이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노무현 정부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인데, 보수세력들은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유약하고 한미 동맹을 충분히 지지하지 않는다고 딱지를 붙여왔다. MB 독트린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한다;
  • 한미동맹. 이명박의 외교정책 참모이며 전 외무장관인(1996~98) 유종하는 미국이 대통령 당선인 이명박에 대해 하등의 걱정할 것이 없다고 대사관측에 반복적으로 말해왔다. 이명박은 이라크에 남한 부대파견 연장과 한미 FTA 비준을 찬성한다. 비록 이명박은 전시작전권 이양이 재협상돼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전작권 이양 동의안의 상세내용보다는 단지 이양 시기의 재 검토를 아마 생각할 것이다.
  • 북한. 이명박은 핵 개발의 완전한 해체와 진정한 북한의 개방을 촉진하는 하나의 전략적 정책을 추구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는 경제 지원은 비핵화의 과정에 더욱 엄격한 조건을 달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왔고, 노무현 정부의 접근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만일 북한이 자신의 핵 무기들을 해체하고 북한사회를 개방한다면, 북한이 10년 안에 미화 3,000 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을 획득하도록 남한이 도울 것이라고 이명박은 말해왔다9). 그 10년 이후에는 두 나라가 인권과 통일을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 동북아시아. 유종하는 이명박이 중국과 일본에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것이고, 한미일 삼자동맹은 향상 되야 한다고 대사관측에 말했다.

경제 계획: 운하는 두고 볼일

6.(기밀) 이명박의 국내 정책은 자신의 “747 정책”이 중심을 이루며, 이는 7퍼센트의 연간 성장율과 일인당 국민소득을 두 배로 키워 미화 40,000 달러 그리고 한국을 10년 안에 7대 경제 대국이 되도록 하겠다는 공약이다. 이명박은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간에 벌어지고 있는 경제 격차를 시정하기 위한 열쇠는 빠른 성장이라고 말한 바있다.
7.(기밀) 자신의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려고 내놓은 남북운하 사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밀어 붙이기로 결심했다고 이명박은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이 이 사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사업이 좋은 구상이고 나는 결코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은 서울 중심부에 자신의 요즘 인기를 구가하는 청계천의 경우와 전국을 연결한 고속도로를10)두고 처음에 의구심을 사람들이 극복했듯이 사람들이 이 구상에 동조하게 될 것임을 자신은 확신한다고 말했다. 대사관 접선책에 따르면, 이명박의 운하구상은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핵심이 아니며, 이 것과 다른 선거공약 등이 그냥 그렇게 나와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명박이 한국민을 존경하고 돌보는 모습을 보여 주는 한, 그가 운하 건설과 한국 경제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데 실패하더라도 이명박이 추문들을 극복하고 정치적으로 생존할 것이다.

개인적 특성 및 관리 방식

8.(기밀) 현대 건설을 이끌던 당시에서부터, 이명박은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치부했고 매우 세부적이며 성과 지향적이다. 이명박의 몇몇 측근 보좌관들은 이명박은 자신이 즉석커피를 타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들먹이지 않는다고 대사관측에 말했다. 이명박은 어떤 일이던 달성하는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몇몇 정보에 따르면 대통령 당선자는 수줍음을 타며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동료로 맞을 만큼 외향적이지 않다. 어떤 인사들은 이런 점이 전 당대표이고 경선 경쟁자였던 박근혜와 혹은 한나라당 탈당한 이회창에 다가서는데 왜 이명박이 썩 잘해내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명박이 대인관계가 어설픈 결과로 제한적인 핵심 측근인 친구들과 지인들만 신뢰한다고 한다.
9.(기밀) 이명박의 손위의 형인 국회 부의장 이상득과 전 갤럽 회장인 최시중이 이명박의 정치적 두뇌역할로 심임을 받고 있다. 많은 접선책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강한 이명박이 유일하게 이 두 인물에게만 영향을 받을 수있다고 대사관측에 말한 바있다. 이상득은 이명박이 회의나 행사에 종종 지각을 한다고 최근 회동에서 대사관측에 말했다. 이상득은 사업가로써 늦어도 탈이 없지만 정치계에선 모든 행사에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고 자신의 동생에게 말했다고 했다. 이상득 부의장은 후보당시 이명박이 감 잡기 시작했다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자신이 시간을 준수하라고 자주 이명박에게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인적사항

10.(기밀) 이명박은 김윤옥과 결혼했으며 아들 하나와 세 딸을 두고있다. 그의 생일과 그의 결혼기념일은 12월 19일인데 한국 대선일이기도 하다. 옛 친구에 따르면 이명박이 자신의 생일날 결혼하기로 한 것은 자신의 기념일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11.(기밀) 이명박의 참모들은 이명박은 매일같이 러닝머신에 한 시간을 달린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광고하고 있지만 측근 참모들은 시간이 있을 때만 이명박이 달리기를 한다고 정치 참사관에게 말했다. 다른 측면에 대해선 공개적인 언급이 있던 적이 없었지만, 이명박 측근에 따르면 이명박이 골프를 치며 시간이 되면 즐긴다고 한다. 이명박이 외교정책에 약할 것이란 인식에 반기라도 들듯이, 이명박의 참모들은 이명박이 해외에서 수년간 근무했다고 강조하고 심지어 이명박이 영어로 사업을 지휘할 수있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경험해본 결과 그의 영어는 기초적 수준이며 모든 업무 회의상에 통역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의 영어는 “사랑방 외교”나 정상회담 혹은 국제 모임 등에서 다른 지도자들과 짮은 대화에 참여할 만큼은 된다. – 노무현에 비하면 상당한 진전이다.11)

논평

12.(기밀) 이명박은 한국전쟁이후에 남한이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던 시절의 산물이라고 할 수있다. 1960년대와 1970연대의 한국 기업문화인 “할 수있다”의 전형적 인물인 이명박은 건설계의 거물로써 한국을 변모시키는데 일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한국을 더 낳은 모습으로 변화시키리라고 한국민은 믿기 때문에 12월 19일에 당선된 것이다. 예전엔 상상도 못했을 안락하고 부유한 한국인 사이에 이명박의 공약은 그런 열정과 욕구에 불을 다시 당길 수있을지 여부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은 사업에서 또 선거유세에서 성공할 수있는 인성을 보유했음을 증명했다. 지금 그는 “이명박의 방식”과 정치적 교착상태나 자유로운 언론환경 그리고 현대 한국의 강력한 비정부 단체들의 감시라는 현실사이에서 피할 수없는 충돌을 뚫고 돌파구를 마련할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우선 자신이 취임하기 전부터 BBK 추문에 대한 특별검사란 폭풍우를 견뎌내야만 하는데, 바로 그 점이 그가 4월 총선에서 자신의 야망찬 많은 계획들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원내 다수당을 달성할 수있을지를 가늠하게끔 할 수있다. 논평 끝
버시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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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07SEOUL3575.rtf
C O N F I D E N T I A L SEOUL 003575 
 
SIPDIS 
 
SIPDIS 
 
E.O. 12958: DECL: 12/10/2014 
TAGS: KN KS PGOV PREL PINR
SUBJECT: WHO IS PRESIDENT-ELECT LEE MYUNG-BAK? 
 
REF: A. SEOUL 02539 
     ¶B. SEOUL 02800 
     ¶C. SEOUL 02960 
     ¶D. SEOUL 02652 
 
Classified By: Amb. Alexander Vershbow.  Reasons 1.4 (b,d). 
 
¶1.  (C) SUMMARY: President-elect Lee Myung-bak is a self-made 
businessman and politician and his successful experience as 
CEO of Hyundai Construction and Seoul Mayor lead many to 
believe he will accomplish great things as the seventh 
President of Korea.  The most thoroughly investigated 
presidential candidate ever, Lee has lived a life 
interpreting the law of the land rather loosely, as was 
customary for the rich and powerful in the free-wheeling 
1970s and 1980s in Korea.  However, Lee claims his shady 
business deals are all in the past.  To prove the point he 
announced December 14 he would donate all his assets other 
than his family residence to the poor of Korea.  Lee 
Myung-bak's rags-to-riches life story already has been made 
into two television series; looking at his life gives some 
insight into what kind of president he might become when 
sworn in on February 25.  END SUMMARY 
 
---------- 
BACKGROUND 
---------- 
 
¶2.  (SBU) Grand National Party (GNP) Candidate Lee Myung-bak 
was born in Japan in 1941, and with his family moved back to 
Korea after national liberation.  Lee's family was extremely 
poor, even by the post-war standard, and Lee often cites 
poverty as a factor in making him what he is today.  The 
fifth of seven children, Lee had to work from his youngest 
years and through college in order to pay for his studies. 
Lee's involvement in pro-democracy protests as Korea 
University student-body president led to a six-month stint in 
prison.  Lee was exempted from military service due to lung 
disease.  After joining the Hyundai Construction Company in 
1965, he became President at 35, Chairman at 46, and served 
as CEO from 1976 to 1992.  At Hyundai, Lee was know as a 
tough business executive, and he often boasted that the late 
Hyundai founder, Chung Joo-yung, was completely dependent on 
him. 
 
¶3.  (C) Lee first entered politics in 1992 on a proportional 
representation ticket for the then-ruling New Korea Party 
(the predecessor of the GNP).  After an unexceptional term in 
the Assembly, he ran for the prestigious Jongro District seat 
in central Seoul.  In that race he beat out President Roh 
Moo-hyun.  He lost that seat in 1998 due to campaign finance 
violations and, after stepping down, spent a year at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as a visiting scholar.  He returned to 
Seoul and was elected mayor in 2002.  According to close 
aides, Lee had the Blue House in his sights since the late 
1990s and ran for Mayor to gain further national recognition 
and experience. 
 
¶4.  (SBU) As Seoul Mayor from 2002 to 2006, Lee initiated and 
oversaw a number of ambitious projects, key among which was 
the environmental recovery of Cheonggye Stream in downtown 
Seoul, which had been severely polluted and covered by an 
elevated highway since the 1960s; the construction of a 
grassy plaza in front of Seoul City Hall; the streamlining of 
the bus system; and opening of the Seoul Forest.  These 
projects -- especially Cheonggye Stream, reopened in 2005 -- 
continue to be popular with Seoul's citizens and helped Lee 
establish a reputation as an environmentally conscious leader 
dedicated to improving the quality of life for Seoul 
citizens.  As Hyundai Construction CEO and as Mayor, he 
earned the nickname "Bulldozer Lee" for his accomplishments 
and fondness for grand construction projects. 
 
-------------- 
FOREIGN POLICY 
-------------- 
 
¶5.  (SBU) The "MB Doctrine" -- Lee's foreign policy package 
-- is somewhat vague, but clearly reflects conservative 
views.  Lee argues that his foreign policy will be based on 
national interests, not ideologies.  This is an indirect 
criticism of the Roh administration, which conservatives have 
labeled as soft on North Korea and not sufficiently 
supportive of the U.S.-ROK alliance.  The MB Doctrine 
includes the following elements: 
 
-- U.S.-ROK ALLIANCE.  Lee foreign policy adviser and former 
Foreign Minister (1996-98) Yoo Chong-ha has repeatedly told 
us that the U.S. has nothing to worry about from 
President-elect Lee.  Lee supports extending the South Korean 
troop deployment to Iraq and ratification of the KORUS FTA. 
Although he has said OPCON transfer should be renegotiated, 
he may only seek to review the timeline of the transfer 
rather than the specifics of the agreement. 
 
-- NORTH KOREA.  Lee promises to pursue a strategic policy 
that promotes the complete nuclear dismantlement and a 
genuine opening of North Korea.  He has argued that economic 
assistance should be more strictly conditioned on progress 
toward denuclearization, in contrast with the Roh 
Administration's approach.  If North Korea dismantles its 
nuclear weapons and opens its society, Lee has said that 
South Korea will help the North attain a per capita income of 
USD 3,000 within ten years, after which the two countries can 
discuss human rights and unification. 
 
-- NORTHEAST ASIA.  Yoo Chong-ha has told us that Lee will 
approach China and Japan flexibly and pragmatically and that 
the U.S.-ROK-Japan trilateral alliance should improve. 
 
------------------------------ 
ECONOMIC PLAN: THE CANAL STAYS 
------------------------------ 
 
¶6.  (C) Lee's domestic policy centers on his "747 Policy," 
which promises to produce a 7 percent annual growth rate, to 
double Korea's per capita GDP to USD 40,000, and to enable 
Korea to become the 7th largest economy within ten years. 
Faster growth, Lee has said, is the key to redressing the 
widening economic gap between rich and poor in South Korea. 
 
¶7.  (C) Despite continued criticism of his proposed project 
for a North-South canal linking the Han and Nakdong rivers, 
Lee has said that he is determined to push it forward. 
"People do not fully understand this project, but if it is a 
good idea, I must not give up."  Lee said he remained 
confident that the people would come around to the idea, much 
the way the people overcame their initial reservations about 
a highway system connecting the country or Lee's now popular 
Cheonggye stream project in central Seoul.  According to 
Embassy contacts, Lee Myung-bak's canal idea was not the key 
to revitalizing Korea's economy, and this and other campaign 
promises would likely turn out to be just that.  However, as 
long as Lee showed he cared for the Korean people and 
respected them, he could overcome scandals and survive 
politically even if he failed to build a canal or effect real 
change in the Korean economy. 
 
----------------------------- 
PERSONAL AND MANAGEMENT STYLE 
----------------------------- 
 
¶8.  (C) Stemming from his days heading up Hyundai 
Construction, Lee puts efficiency above all and is very 
detail- and results-oriented.  Several close Lee aides told 
us that Lee Myung-bak makes his own instant coffee and does 
not pull rank with people.  Lee has confidence in his ability 
to accomplish any task.  However, according to several 
sources, the president-elect is shy -- he is not outgoing 
enough to draw many people into his fold.  Some cite this in 
explaining why Lee has not done a good job reaching out to 
former party chairman and primary rival Park Geun-hye, or to 
GNP defector Lee Hoi-chang.  As a result of his clumsiness 
with personal relationships, it is said he trusts only a 
small inner circle of friends and confidants. 
 
¶9.  (C) Lee's elder brother, National Assembly Vice Speaker 
Lee Sang-deuk, and former Gallup Chairman Choi Shee-joong are 
credited with being Lee Myung-bak's political brain.   Many 
contacts have told us that President-elect Lee, with a strong 
mind of his own, can be influenced only by these two.  Lee 
Sang-deuk told us in a recent meeting that Lee Myung-bak was 
often late for meetings and events.  The elder Lee said he 
told his brother that it may have worked for him to be late 
as a businessman, but in politics, you had to arrive to all 
events on time.  Vice Speaker Lee said, laughingly, that 
then-candidate Lee had started to catch on, but he still had 
to remind him frequently to be on time. 
 
-------------- 
PERSONAL NOTES 
-------------- 
 
¶10.  (C) Lee is married to Kim Yun-ok and has one son and 
three daughters.  His birthday and his wedding anniversary 
are December 19, the day of Korea's presidential election. 
According to an old friend, Lee chose to get married on his 
birthday so he would not forget his anniversary. 
 
¶11.  (C) Lee Myung-bak advisors have publicly touted the fact 
that Lee runs one hour every day on a treadmill, but close 
advisors told poloff that he only ran when he had time.  On 
the flip side, while there has been no public mention of it, 
according to those close to Lee, Lee enjoys golf and plays 
when he can.  Probably to counter the perception that he is 
weak on foreign policy, Lee's advisors highlight Lee's years 
working overseas and some even note that Lee can conduct 
business in English.  However, experience has shown that his 
English is rudimentary and he will need an interpreter for 
all working meetings.  That said, his English is sufficient 
to conduct some "hallway diplomacy" and engage in chit-chat 
with other leaders at summits and international gatherings -- 
a significant advance over Roh Moo-Hyun. 
 
------- 
COMMENT 
------- 
 
¶12.  (C) Lee Myung-bak is very much the product of the 
post-Korean War rapid South Korean economic growth. 
Personifying the "can-do" attitude of Korean businessmen of 
the 1960s and 1970s, Lee has spent his life changing Korea as 
a construction magnate, and he was elected December 19 
because Koreans believe he can change Korea for the better. 
Lee's promise is about whether he can rekindle such passion 
and desire among South Koreans who are now rich and 
comfortable beyond their wildest imagination.  Lee has proven 
he has the personality to succeed in business and on the 
campaign trail.  Now, he must see if he can guide a 
successful path through the inevitable clash between "the Lee 
Myung-bak way" and the realities of political gridlock, a 
free press, and the scrutiny of modern Korea's strong array 
of NGOs.  But first he must weather the storm of a special 
investigation into the BBK scandal even before he takes 
office, which could determine whether he can achieve the 
parliamentary majority he needs to achieve many of his 
ambitious plans in April's general elections.  END COMMENT 
VERSHB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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