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꿈을 다시 세우기 위한 자료들...


꿈을 다시 세우려고 내가 생각하는 위대한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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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7][8]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었고,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5월 23일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하였다.[9] 사망 후 일주일간 봉하 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10]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영결식에는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를 메웠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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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이탈리아 모데나 교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의 가족은 가난했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을 굽는 사람이었고, 어머니 아델레 벤투리 파바로티는 시가(Cigar) 공장에서 일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교에서는 음악이 아닌 교육학을 전공했으며, 교육자와 성악가의 길을 모두 걸을 수는 없다는 아버지의 충고로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2]
아마추어 테너로도 활동했던 아버지와 함께 모데나 지역의 로시니 말레 합창단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에 입문하였으며, 1961년 4월 29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당시 경제학을 공부하던 대학생이었던 아두아 베로니와 혼인하였으나, 이후 이혼하고 2003년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재혼하였다.
2006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2007년 9월 6일 모데나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장례 미사도 모데나의 교회에서 집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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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조정에 출사를 하지 못했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정은 이순신이 함경도 건원보(乾源堡)의 군관으로 있던 1583년 11월,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부친의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졌고, 뒤늦게 고향으로 내려간 이순신은 3년 상을 치렀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草溪) 변(卞)씨 수림(守琳)의 딸이다. 변씨(卞氏)는 1597년 4월 11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후 옥에서 나와 권율의 휘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찾아가는 배 위에서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변씨가 별세한 바로 그날, 어머니의 부고를 아직 전해 듣지 못했던 이순신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는 노령의 어머니를 몹시 걱정했다.
이순신이 어머니의 별세를 알게 된 것은 4월 13일이었다. 이순신은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바다로 나가서야 부음을 접했다.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명령을 수행하던 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4월 19일 남행을 강행해야 했다.
이순신의 이름은 항렬자인 ‘신(臣)’자를 돌림자로 하였다.
맏형은 삼황(三皇)중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를 본 따 희신(羲臣)이라 하였고, 둘째 형인 요신(堯臣)은 오제(五帝)의 요(堯)임금에서 비롯된 것이다.
순신(舜臣) 또한 오제(五帝)의 순(舜)임금을, 동생 우신(禹臣)은 하(夏)왕조의 시조인 우(禹)임금을 따서 지은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 신화와 고대사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제왕들이다.
희신(羲臣).요신(堯臣)은 일찍 죽었으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은 순신과 함께 글을 읽었고, 《사마방목(司馬傍目)》에 요신은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 방씨(方氏)와 결혼하여 회·열·면 등 3형제와 서자로 훈(薰)과 신(藎), 그리고 2명의 서녀를 두었다.
이 중 셋째인 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6세 때 아산 본가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면은 다섯 아들 중에서도 담력과 총기가 출중하여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이순신도 면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고를 접할 당시와 비슷하게도 이순신은 꿈을 통하여 미리 예감했던 것이다.
아들 을 잃은 이순신의 슬픔과 상심은 매우 컸다. 《난중일기》에는 아들의 죽음을 접하는 모습과 그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희신의 둘째 아들 분(芬)은 왜란 당시 성천(成川)으로 피난 가 그곳 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지냈다. 넷째아들 완(莞) 역시 이순신의 막하에서 활약했는데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끝까지 독전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왜란 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병사와 의주부윤을 거쳤으며 정묘호란 중에 종제 신(藎)과 함께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순신과 그의 아들, 조카 등의 전적을 기리기 위해 충남 아산 배암골에 정려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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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손녀가 매년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한푼도 물려받지 못하고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아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와 ABC뉴스 등은 아인슈타인의 장남 한스 알베르트의 양녀 이블린(70)이 지난 13일 캘리포니아주 올버니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블린은 말년에 할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한푼도 남기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노숙자로 살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다고 비참했던 삶을 털어놓았다.

뒤늦게 지난해 할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과 상속권을 놓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생전에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1955년 서류 7만 5000건과 자신의 물품을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에게는 한푼도 남기지 않았다.

지난해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얼굴과 이름, 지적재산권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1000만 달러로 추산된다. 모든 수익은 법적으로 히브리대학에 귀속된다. 사후 아인슈타인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은 마이클 잭슨 등 전 세계적으로 7명에 불과하다.

이블린의 아버지 한스 알베르트는 아인슈타인이 스위스에서 대학시절에 만난 첫 부인 밀레바 마리치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다. 아인슈타인은 1919년 마리치와 이혼하고 사촌 엘자와 재혼한 뒤 1933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아인슈타인은 아들들 결혼에도 불참하는 등 생전에 가족들과는 거리를 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블린은 5개국어를 구사하고 버클리에서 중세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지만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전설 속의 원인 ‘빅풋’ 연구에 헌신했던 괴짜 교수 그로버 크란츠와 결혼했다가 13년만에 이혼한 뒤 생활이 어려워져 노숙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블린은 지난해 상속권 반환 소송을 제기한 직후 CNN 방송에 출연해 “히브리대학 측이 믿기 어려우리만치 가족들에게 지독하게 대했다.”며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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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다 마무리도 잘 하는건 쉬운일이 아닌 것 같다.

지난 인생을 가족사의 불화속에 살았으니

앞으로의 삶은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겠다.

그럴려면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아들
좋은 사위
좋은 형
좋은 친구 ...

등등이 되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면 되는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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