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211806325&code=940202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2&dirId=12013844&docId=21008302&qb=7Jik66CM7KeA7KGxIOuquyDso73sl6wg7ZWc&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RiBkQF5Y7tCssvTKCNVssssssth-332174&sid=UZjbEnJvLDkAACKved4
기사 보다가..
63년 10월 강원도 인제에서 야전공병단 소속 고재봉이 같은 부대 이득령(36)중령집에 침입해 부인과 세 자녀, 가정부 등 일가족 6명을 살해한 사건. 고씨는 귀금속 등을 훔쳐 달아났다가 24일 후 서울에서 검거됐다.
범인 고재봉(당시 27세, 1109야포단 소속 상병)은 1963년 11월 12일 하오 6시쯤 종로5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외사촌동생을 만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땅콩행상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범행사실을 부인하다가 몸수색으로 칼 3자루가 나오자 자백했다. 범행 동기는 박모(朴某) 중령 집에서 도둑질한 죄로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후 박 중령에게 복수하려던 것이었는데, 이득주 중령을 박 중령으로 잘못 알고 저지른 범행이었다. 고재봉은 1964년 3월 10일 사형당했다
뭐지... 죽인 것 자체도 잘못이지만,
사람 잘못 알고 죽였으면 죽은 일가족들은 무슨 죄인거야.
20대때 살인자가 되는 것도 참 ....
1982년 4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경남 의령군 궁유면 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 순경(당시 27세)이 술에 만취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들고 나와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우순경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미친듯이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려 56명이 숨졌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우순경은 생후 1주일된 영아부터 70세가 넘은 할머니에게도 총질을 하며 무려 8시간 동안 토곡리 등 4개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주민 신고로 1시간 20분 뒤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우순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우순경은 자정이 지나자 총기 난사를 멈추고 27일 오전 5시 30분쯤 평촌리 서인수씨의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가 서씨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수류탄 2발를 터뜨려 자폭했다
이날의 사건은 너무나 하잘것 없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사건당일 오후 우범곤 순경은 방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우범곤 순경의 가슴에 파리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그러자 동거녀 전말순씨(당시 25세)가 파리를 잡는다며 우범곤 순경의 가슴을 찰싹 때렸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다. 우범곤 순경은 전말순 씨와 이미 2개월째 동거를 해오던 중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결혼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자책하며 열등감을 가져오던 차였다. 이날 전말순 씨의 행위가 자신을 무시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오해한 그는 술을 마시며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사소한 말다툼이 급기야 인근 4개 시골 마을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놓는 광란의 대참사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1.
고재봉
63년 10월 강원도 인제에서 야전공병단 소속 고재봉이 같은 부대 이득령(36)중령집에 침입해 부인과 세 자녀, 가정부 등 일가족 6명을 살해한 사건. 고씨는 귀금속 등을 훔쳐 달아났다가 24일 후 서울에서 검거됐다.
범인 고재봉(당시 27세, 1109야포단 소속 상병)은 1963년 11월 12일 하오 6시쯤 종로5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외사촌동생을 만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땅콩행상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범행사실을 부인하다가 몸수색으로 칼 3자루가 나오자 자백했다. 범행 동기는 박모(朴某) 중령 집에서 도둑질한 죄로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후 박 중령에게 복수하려던 것이었는데, 이득주 중령을 박 중령으로 잘못 알고 저지른 범행이었다. 고재봉은 1964년 3월 10일 사형당했다
63년 10월 강원도 인제에서 야전공병단 소속 고재봉이 같은 부대 이득령(36)중령집에 침입해 부인과 세 자녀, 가정부 등 일가족 6명을 살해한 사건. 고씨는 귀금속 등을 훔쳐 달아났다가 24일 후 서울에서 검거됐다.
범인 고재봉(당시 27세, 1109야포단 소속 상병)은 1963년 11월 12일 하오 6시쯤 종로5가 버스정류장 앞에서 외사촌동생을 만나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땅콩행상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범행사실을 부인하다가 몸수색으로 칼 3자루가 나오자 자백했다. 범행 동기는 박모(朴某) 중령 집에서 도둑질한 죄로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온 후 박 중령에게 복수하려던 것이었는데, 이득주 중령을 박 중령으로 잘못 알고 저지른 범행이었다. 고재봉은 1964년 3월 10일 사형당했다
2. 김대두
김대두(金大斗, 1950년 - 1976년 12월 28일)는 대한민국의 연쇄 살인자이다.
1975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까지 55일 동안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마을 주민 안종현 씨(63)를 살해한 것을 비롯하여, 무안군, 경기도 평택시, 서울 등지로 9차례를 걸쳐 모두 17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1975년 10월 7일 서울에서는 피해자의 피가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주인 하남석(26)의 신고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연쇄 살인범 김대두는 체포되었을 때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경기도 일대에서 일가족 단위로 4차례나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후 1976년 12월에 사형 선고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75년 10월부터 두 달 동안 김대두는 서울 등 9곳에서 17명을
살해하고 4명은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김대두가 피해자들을 살해한 뒤 빼앗은 금품은 현금
3만700원.고추 30근.청바지 한 벌 등에
불과했다.
3. 우순경(우범곤)
(당시 신문기사)
(단체 장례사진)
1982년 4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경남 의령군 궁유면 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 순경(당시 27세)이 술에 만취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들고 나와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우순경은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미친듯이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려 56명이 숨졌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우순경은 생후 1주일된 영아부터 70세가 넘은 할머니에게도 총질을 하며 무려 8시간 동안 토곡리 등 4개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주민 신고로 1시간 20분 뒤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우순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우순경은 자정이 지나자 총기 난사를 멈추고 27일 오전 5시 30분쯤 평촌리 서인수씨의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가 서씨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수류탄 2발를 터뜨려 자폭했다
이날의 사건은 너무나 하잘것 없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사건당일 오후 우범곤 순경은 방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우범곤 순경의 가슴에 파리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그러자 동거녀 전말순씨(당시 25세)가 파리를 잡는다며 우범곤 순경의 가슴을 찰싹 때렸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다. 우범곤 순경은 전말순 씨와 이미 2개월째 동거를 해오던 중이었는데, 그때까지도 결혼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자책하며 열등감을 가져오던 차였다. 이날 전말순 씨의 행위가 자신을 무시한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오해한 그는 술을 마시며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사소한 말다툼이 급기야 인근 4개 시골 마을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놓는 광란의 대참사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4.
지존파
지존파 사건(至尊派 事件)은 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까지 김기환(당시 26세) 등 지존파 일당 7명이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이다. 지존파(至尊派)는 1993년 조직된 연쇄 살인 조직이다. 1993년 4월 김기환이 학교후배 강동은(당시 22세)과 교도소 동기 문상록(당시 23세) 등을 포섭하여 결성한 조직이며, 이름은 지존무상이라는 홍콩영화에서 따왔다. 조직원은 김기환, 김현양(당시 22세), 강동은, 문상록, 강문섭(당시 20세), 백병옥(당시 20세), 송봉호(당시 18세), 그리고 이경숙(여성, 당시 23세) 등이다.
1993년 4월 김기환은 강동은, 김현양 등을 포섭하여 '지존파'라는 조직을 조직하고 현대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1993년 7월 길가던 한 20대 여인을 목졸라 살해하고 그 해 8월에는 조직을 이탈한 송봉호를 살해했다. 1994년 9월 8일 이종원과 이 모(당시 27세)여인을 납치하여 이종원을 9월 10일 살해하고 그 사흘 후 소윤오 부부를 납치하여 9월 15일에 살해했다.
이들의 범죄는 지존파 6명 전원이 1994년 9월 21일에 체포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체포되었을 때까지 반성이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이라며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 해 10월 31일 재판 결과 이틀 전에 가담한 이경숙을 제외한 지존파 6명 전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어 1995년 11월 2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경숙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점에 대한 정상참작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징역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일단락되었다.
1994년 9월
20일.
끔찍한 사건의 전말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살인이야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렇지만 직접 살인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고, 살인 행위를 하기 위한 '아지트'를 만들고,그 안에 피해자를 감금시켜두는 '감옥'과 시체를 태워 증거를 없앨
'소각장'까지 철저하게 갖추어 그야말로 "완벽 살인"을 행한 조직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조직의 이름은
지존파.
납치되었던 한 여인의 극적인 탈출로 비로소 이들의 끔찍한 살인
행각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직원은 총
일곱명.그들의 이름과 전과기록은 이렇다.
김기환(당시 26세, 강간 치상
1범)
강동은(당시 21세, 특수 절도 등
2범)
김현양(당시 22세, 상해
1범)
문상록(당시 23세, 특수 절도 등
3범)
백병옥(당시 20세, 특수 강도 등
2범)
강문섭(당시 20세, 전과
없음)
이경숙(당시 23세, 여, 절도
1범)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미리 밝혀둔다.
많은 사람들이 이경숙을 탈출했던 피해자
이모씨와 동일인물로 착각하고 있던데(네이버 지식인에도 이모씨를 이경숙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이경숙과 피해자 이모씨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이모씨의 경우, 당시 애인과 함께 지존파
일당에게 납치되었던 여인으로 살려준다는 조건 하에 강제적으로 그들의 살인행위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가 김현양의 다이너마이트 부상 사건으로 함께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극적으로 탈출하여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린 피해자이다.
그러나 이경숙은 진작부터 지존파를 알고
있었고, 지존파가 잡히기 이틀 전부터 조직에 가담한 절도 전과 1범이자
지존파의 부두목 강동은의
애인이었다.
이경숙의 경우, 직접적으로 살인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과 뒤늦게 합류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사형을 면했지만
나머지 조직원들은 전부 사형선고를
받고 1년 뒤 바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재판 과정에서 강동은이 자신의 애인인
이경숙을 극도로 감쌌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냉혈한인 살인마도 자기가 사랑했던 여자한테만은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암튼 지킬과 하이드처럼 인간의 이중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들의 사건일지는
이렇다.
1993년 4월
도박판에서 서로 만나게 됨.
그 후 '가진 자들을
향한 맹목적인 복수' 라는 지령 하에 김기환을 두목으로
당시 유행했던 홍콩 영화 <지존무상>의 이름을 따 조직 이름을 '지존파'로
결성.
(결정적으로 이들의
범죄를 부추겼던 사건은 당시 있는 자들이 돈을 주고
부정으로 대학을
입학했다 발각되었던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이었음)
1993년 5월부터
11월까지 범죄를 위한 도구와
아지트를 마련하기 위해 대전에 있는 '둔산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함.
1993년 7월
18일 밤 11경,
살인예행연습을
실시한다는 명목 하에 귀가하던 최모양을 납치하여 야산으로 끌고 가
차례로 강간, 살해 후 암매장.
1993년
8월
같은 조직원이었던
송봉우(당시 18세)가 공동 예금통장에서 300만원을 빼들고
달아난
사실을 눈치 채 복수한다는 명목 하에 그를 야산으로
유인,
'배신한 자는 죽인다'는 강령에 따라 칼과 곡괭이로 찍어 잔혹하게 살해
후 암매장.
1994년
5월
전남 영광군 불갑면의
두목 김기환의 어머니집을 아지트로 개조. 본격적인 살인공장을 만들다.
(감금시설, 소각로
포함)
1994년 6월
17일
두목 김기환, 동네
선배의 조카인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을 강간하여
징역 5년형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두목을 잃은 지존파
일당, 강동은을 부두목으로 삼고 감방에서 김기환에게 모든 범죄 지시를 받은 뒤
본격적인
범행 활동 개시.
1994년 9월 8일
새벽
경춘가도 양수리
부근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이모씨 일행을 트럭으로 납치.
돈이 없음을 확인하고
바로 다음 날 남자는 살해하고
이모씨는 윤간 후
감금, 신고하지 못하도록 남자의 살인에 강제로 가담하게 함.
9월
10일, 남자의 시신과 훔친 차를 절벽으로 밀어뜨려 음주 후 사고로 위장.
1994년 9월
13일
성묘 후 집으로
돌아가는 중소기업 사장 소씨 부부를 납치,
아내를 인질로 잡아둔
후 소씨에게 현금 1억원을 가져오도록 지시.
거액 강탈 이후
증거인멸을 위해 공기총으로 소씨를 살해하고 부인인 최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
이 과정에서 역시
강제로 인질인 이씨를 가담시키고, 인육을 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함.
다이너마이트,
공기총, 군용 대검 등의 무기를 무기밀매상을 통해 구입.
당시 부유층 고객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던
강남의 H 백화점의
주요 고객 명단까지 입수.
9월
17일, 조직원 보충을 위해 강동원의 애인이었던 이경숙을 조직에
가담시킴.
1994년 9월
15일
다이너마이트 모의
실험 도중 김현양 부상.
인질인 이모씨와 함께
병원에 동행.
김현양이 치료받는
사이 이모씨, 필사적인 탈출 감행.
1994년 9월
16일 새벽 2시
이모씨, 서울
서초경찰서에 지존파 사건을 신고.
1994년 9월
19일
마침내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이경숙
지존파 조직원 모두
검거.
이들은 1심과 3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경숙 제외)
그리고 1995년 11월, 김기환을
비롯한 지존파 조직원 여섯명의 사형 집행이 모두 이루어졌다.
붙잡히자마자 수많은 취재진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했다는
둥,
어머니를 못 죽여 한이라는 둥, 인육을 먹었다는 둥 주장했던 김현양과
강남의 야타족, 오렌지족을 다 못 죽여 한이 된다고 이를 갈았던 강동은
등은
재판 과정에서 비로소 회개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두목 김기환 만큼은 마지막 순간에서도 뉘우치는
모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회와 가정에게 이
모든 원인을 돌렸다고
5.
온보현
94년 9월 온보현(당시 37세)은 훔친 택시를 이용해 부녀자 6명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이 중 2명을 살해했다. 그는 범행일지에 "세계 제일의 살인마가 되겠다"고 적어 놓기도 하고, 경찰조사에선 "내 나이만큼 사람을 죽이려 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과 13범의 살인택시 운전기사
온보현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에서 5남1녀중 둘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롤 완전히 졸업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고 한다. 어릴때는 성격도 온순하고 착해서 마을 사람들로 부터 이쁨도 많이 받았으나 음주벽과 외도가 심한 아버지 밑에서 성격와 충동조절에 큰 장애를 안고 성장.
초등학교 5학년때 반복되는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로 학교 교육마저 받지 못하고 사회 밑바닥에서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아 용돈벌이를 하며 살던 중 어머니가 음독자살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음.
24살의 온보현은 이미 늙어서 힘이빠진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른 후 가출.
이후 조금만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둘러 전과 13범이 됨.
그러다 유일하게 사귀어본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떠나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결심.
그러나 용기가 없어 자살도 못하고 보니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이(38)만큼 여성들을 살해함으로써 존재를 알린 다음에 자살하겠다' 고 마음을 고쳐먹음.
->연쇄살인을 삶의 의미로 삼은 온보현은 '거사' 를 위한 의식으로 1994년 8월 13일.
13년전 어머니가 음독자살한 바로 그날, '온씨 집성촌'을 찾아 숙부에게 인사한후 조상묘에 벌초를 하고 그 옆에 자신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서 목표로 하는 38명의 여성을 다 살해하고 나면 이 구덩이에 들어가 스스로 죽겠다고 다짐.
->살인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겠다 맘먹은 온보현은 '살인일기'를 쓸 수첩을 구입하는 것으로
연쇄살인 준비작업 시작. 잠시동안 택시기사로 일했던 온보현은 여성들이 쉽게 믿고 승차할 거라고 판단하여 일단 택시를 훔치기로 마음먹음.
->8월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k운수' 차고가 경비원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는것을 본 온보현은 손쉽게 낡은 '스텔라' 택시를 훔쳐서 트렁크에 칼. 삽. 낫. 노끈. 포장용테이프등 범죄도구들을 가득 싣는것으로 범행준비를 마침.
-> 8월28일 아침7시. 인적이 드문 강동구 암사동 길가에서 젊은여성을 발견하고 차에 태움.
얼마쯤 가다가 차를 세우고 흉기로 위협하여 주민등록증과 학생증을 빼앗은다음 영동고속도로의 이천부근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야산으로 끌고가기 위해 안전벨트를 푸는순간,여성은 차문을 열고 마구 달아나면서 양손을 흔들어 댔고, 온보현을 차량 통행이 많은 아침 시간이라 검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래도 차를 몰고 도주.
->9월1일 새벽1시. 송파구 잠실동 길가에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노래방 주인 권씨(43)를 차에 태운 온보현은 역시 인적이 없는 곳에 차를 세우고 택시 안에서 권여인을 강간한 후 반항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고향선산으로 납치. 미리 파놓은 구덩이 옆에서 권여인을 다시 강간하고는 몸을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후 1미터 깊이의 구덩이로 밀어넣음.
그리고는 권여인을 생매장하기 위해 삽 등 도구를 챙기러 택시로 돌아왔고, 뒷자리에 남겨둔 권여인의 가방을 뒤져 현금과 수표등 1200만원을 찾아냄.
그 사이 권여인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을 움직여 구덩이를 빠져나와 결박을 풀어내고 범인이 올라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도망가 근처의 공사장인부들에게 구출.
한편 온보현은 돈과 삽을 챙겨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피해자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근처 덤불에 몸을 숨긴 온보현은 경찰이 자신의 택시를 견인해 간 것까지 지켜본 후 자리를 떴다.
-> 전북 김제 경찰서는 택시에서 지문을 찾아내어 전과13범의 온보현임을 확인.
그러나 떠돌이었던 온보현의 종적을 찾아내지는 못함.
-> 9월 9일 저녁5시. 온보현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조정 경기장' 부근 식당 주차장에서 열쇠가 꽂힌 채 주차되어 있는 택시를 훔쳐 달아남.
->9월 11일 저녁7시 반, 구로구 독산동 길가에서 홀로 택시를 기다리던 엄지혜(21)양을 태운뒤 인적이 없는 길가에서 흉기로 위협하여 강간후 엄양의 소지품을 뒤져 현금31만원을 갈취.
테이프로 결박후 강원도 횡상의 야산으로 엄양을 끌고 들어간 온보현은 나무에 엄양의 손과 발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또 다른 범행 대상을 찾아 산을 내려옴.
너무 쉽게 잡혀서 반항도 하지 않는 피해자를 살해하는것은 너무 싱겁다는 자만심에서 저지른 패착.
그러나 엄양을 그 사이에 혼신의 힘을 다해 손과 발을 움직였고 몇시간후 결박을 풀어내고 도망쳐
인근 횡성경찰서로 감.
->9월 12일 오전. 횡성경찰서 형사계는 엄양의 진술에 따라 현장을 답사하여 조사를 마친뒤.
범인이 도주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범행 현장에서 잠복하여 범인을 기다리는 수사 대신에 엄양이 탔던 택시를 찾아 서울소재 택시회사를 뒤지는 '지나치게 앞선 수사'에 주력하여 온보현을 검거할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림.
-> 횡성 야산에 여성을 묶어두고 온 온보현은 어서 다른 희생자를 데리고 돌아가 성폭행하면서 마음대로 유린할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다음날인 12일 밤9시 반경. 서초구 서초동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허진아(26)씨를 납치한 온보현은 역시 테이프로 결박후 횡성 야산으로 데리고 감.
그러나 전날 엄양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벌써 세번째 피해자가 도주한 것을 안 온보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진아씨를 강간한후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얼굴에 비닐 봉지를 씌운 뒤 삽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 내리쳐서 살해함. 9월 13일 새벽 5시 반. 서울 풍납동 지점에서 허양의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던 온보현의 모습이 cctv 에 찍혔으나, 밀수사의 폐혜로 김제경찰서에서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cctv 화면속의 인물인
온보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지나감.
->9월 13일 밤8시. 첫번째 살인으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 강동구 천호동에서 귀가하는 노영선(19)을 납치. 같은방법으로 노양을 결박한 온보현은 경북김천까지 가서는 한 모텔로 노양을 데려감. 밤늦은 시간이라 주위의 시선도 없었지만, 노양이 워낙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용기를 얻어 다른 여성들과 달리 안락한 침실에서 성폭행하기로 마음을 먹음. 노양을 강간한 후 신분증을 꺼내 주소등을 확인한 온보현은 왠지 노양에게는 나쁜인상을 주기 싫어져 결국 노양을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는 '이상한 친절'을 베품.
-> 온보현은 노양(강간만 하고 집에 데려다준 여자)을 강간한 다음날인 9월 14일
저녁 9시경 송파구 가락동 길가에서 아동복지학교에서 고아들을 보육하고 기르는 교사박승연(24)을 태움. 박양은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으슥한 곳에 차를 세우자 강하게 항의했고, 온보현은 흉기를 꺼내 위협함.
그러나 박양은 주눅들지 않고 거세게 저항함. 온보현은 박양을 마구 찔러대다가 자신도 손에 큰상처를 입음. 온보현은 온몸을 찔려 피를 흘리고 탈진한 박양을 강간했고, 반항해서 손을 다치게 만든 분풀이로 다시 박양을 마구 찔러 살해함. 그리곤 박양의 지갑에서 현금14여만원을 꺼낸후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북도 금능군 부근 도로변에 있는 지하통로입구에 사체를 던져 유기.
->이후 온보현은 박양의 저항에 다친 손을 치료하느라 추가범행을 못했을뿐만아니라 박양의 저항에 적지않은 두려움을 느껴 섣불리 범행을 재개하지 못한채 보름가까이 조용히 지냄.
그러나 9월 19일부터 지존파의 연쇄살인 이야기가 대대적으로 언론을 장식해 온보현에게도 범행에 대한 자극을 강하게 줌.
한편 권여인납치, 강도 강간 및 살인 미수 사건을 수사하던 전북김제 경찰서는 9월 15일 온보현에 대한 공개 지명 수배와 함께 공개수사 체제로 전환했고, 용산경찰서는 9월 23일에서야 현금자동 지급기 cctv에 찍힌 범인의 사진과 인상착의에 대한 공개수배.
-> 자기 나이만큼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계획으로 출발한 범행이었으나, 온보현은 무엇이든 계획을 세워 끝까지 실행해본 경험도 없었고 그런 능력도 없었음.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저지른 범행이 허술한 사회 감시망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었지만, 두번째 살인을 하다가 큰 부상을 입자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됨.
지존파 사건을 접하며 다시 범행 의지를 불태우려 애써 보았지만 한번 꺾인 자신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스스로 작성한 '살인일기'를 읽으며 자기 범행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느낌.
-> 9월 27일 온보현은 범행을 시작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살을 결심하고, 범행에 사용한 도구들과 피해자들에게 빼앗은 물건들, 그리고 살인일기를 챙겨들고 고향인 김제를 향해 택시를 운전하고 가다가 오후 7시 라디오에서 자신의 공개 수배 내용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에 없던 호소력을 가지고 마음을 파고들자 잠시 차를 멈추고 살인일기를 꺼내 '지존파와 같은 대접을 받기 위해 지존파를 검거한 서초경찰서에 자수하러 간다'
는 심경을 기록. 자신을 수배한 김제.용산경찰서는 양에 안차고 지존파를 검거한것으로 유명해진 서초경찰서라야 자신의 범행을 제대로 밝혀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라고 판단.
어린애처럼 유치한 영웅 심리를 가진 덜 떨어진 범인 온보현에게 무방비 상태로 농락 당한 한국사회와 경찰이 더욱 초라해 보인 일대의 사건
-> 온보현은 서초경찰서에 자수한 지 두달이 채 안된 1994년 11월 사형선고를 받음.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1년후인 1995년 11월 2일. 김기환 등 지존파 일등 6명 및 노인 연쇄살인범 지춘길 등과 같은 날 사형이 집행.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에서 5남1녀중 둘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롤 완전히 졸업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고 한다. 어릴때는 성격도 온순하고 착해서 마을 사람들로 부터 이쁨도 많이 받았으나 음주벽과 외도가 심한 아버지 밑에서 성격와 충동조절에 큰 장애를 안고 성장.
초등학교 5학년때 반복되는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로 학교 교육마저 받지 못하고 사회 밑바닥에서 이런저런 일거리를 찾아 용돈벌이를 하며 살던 중 어머니가 음독자살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음.
24살의 온보현은 이미 늙어서 힘이빠진 아버지에게 심한 폭력을 휘두른 후 가출.
이후 조금만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둘러 전과 13범이 됨.
그러다 유일하게 사귀어본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떠나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결심.
그러나 용기가 없어 자살도 못하고 보니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이(38)만큼 여성들을 살해함으로써 존재를 알린 다음에 자살하겠다' 고 마음을 고쳐먹음.
->연쇄살인을 삶의 의미로 삼은 온보현은 '거사' 를 위한 의식으로 1994년 8월 13일.
13년전 어머니가 음독자살한 바로 그날, '온씨 집성촌'을 찾아 숙부에게 인사한후 조상묘에 벌초를 하고 그 옆에 자신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서 목표로 하는 38명의 여성을 다 살해하고 나면 이 구덩이에 들어가 스스로 죽겠다고 다짐.
->살인해 나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겠다 맘먹은 온보현은 '살인일기'를 쓸 수첩을 구입하는 것으로
연쇄살인 준비작업 시작. 잠시동안 택시기사로 일했던 온보현은 여성들이 쉽게 믿고 승차할 거라고 판단하여 일단 택시를 훔치기로 마음먹음.
->8월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k운수' 차고가 경비원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는것을 본 온보현은 손쉽게 낡은 '스텔라' 택시를 훔쳐서 트렁크에 칼. 삽. 낫. 노끈. 포장용테이프등 범죄도구들을 가득 싣는것으로 범행준비를 마침.
-> 8월28일 아침7시. 인적이 드문 강동구 암사동 길가에서 젊은여성을 발견하고 차에 태움.
얼마쯤 가다가 차를 세우고 흉기로 위협하여 주민등록증과 학생증을 빼앗은다음 영동고속도로의 이천부근 갓길에 차를 세우고 야산으로 끌고가기 위해 안전벨트를 푸는순간,여성은 차문을 열고 마구 달아나면서 양손을 흔들어 댔고, 온보현을 차량 통행이 많은 아침 시간이라 검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래도 차를 몰고 도주.
->9월1일 새벽1시. 송파구 잠실동 길가에 영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노래방 주인 권씨(43)를 차에 태운 온보현은 역시 인적이 없는 곳에 차를 세우고 택시 안에서 권여인을 강간한 후 반항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여 고향선산으로 납치. 미리 파놓은 구덩이 옆에서 권여인을 다시 강간하고는 몸을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후 1미터 깊이의 구덩이로 밀어넣음.
그리고는 권여인을 생매장하기 위해 삽 등 도구를 챙기러 택시로 돌아왔고, 뒷자리에 남겨둔 권여인의 가방을 뒤져 현금과 수표등 1200만원을 찾아냄.
그 사이 권여인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을 움직여 구덩이를 빠져나와 결박을 풀어내고 범인이 올라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도망가 근처의 공사장인부들에게 구출.
한편 온보현은 돈과 삽을 챙겨 구덩이로 돌아왔으나, 피해자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근처 덤불에 몸을 숨긴 온보현은 경찰이 자신의 택시를 견인해 간 것까지 지켜본 후 자리를 떴다.
-> 전북 김제 경찰서는 택시에서 지문을 찾아내어 전과13범의 온보현임을 확인.
그러나 떠돌이었던 온보현의 종적을 찾아내지는 못함.
-> 9월 9일 저녁5시. 온보현은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 조정 경기장' 부근 식당 주차장에서 열쇠가 꽂힌 채 주차되어 있는 택시를 훔쳐 달아남.
->9월 11일 저녁7시 반, 구로구 독산동 길가에서 홀로 택시를 기다리던 엄지혜(21)양을 태운뒤 인적이 없는 길가에서 흉기로 위협하여 강간후 엄양의 소지품을 뒤져 현금31만원을 갈취.
테이프로 결박후 강원도 횡상의 야산으로 엄양을 끌고 들어간 온보현은 나무에 엄양의 손과 발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또 다른 범행 대상을 찾아 산을 내려옴.
너무 쉽게 잡혀서 반항도 하지 않는 피해자를 살해하는것은 너무 싱겁다는 자만심에서 저지른 패착.
그러나 엄양을 그 사이에 혼신의 힘을 다해 손과 발을 움직였고 몇시간후 결박을 풀어내고 도망쳐
인근 횡성경찰서로 감.
->9월 12일 오전. 횡성경찰서 형사계는 엄양의 진술에 따라 현장을 답사하여 조사를 마친뒤.
범인이 도주하여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범행 현장에서 잠복하여 범인을 기다리는 수사 대신에 엄양이 탔던 택시를 찾아 서울소재 택시회사를 뒤지는 '지나치게 앞선 수사'에 주력하여 온보현을 검거할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림.
-> 횡성 야산에 여성을 묶어두고 온 온보현은 어서 다른 희생자를 데리고 돌아가 성폭행하면서 마음대로 유린할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다.다음날인 12일 밤9시 반경. 서초구 서초동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허진아(26)씨를 납치한 온보현은 역시 테이프로 결박후 횡성 야산으로 데리고 감.
그러나 전날 엄양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벌써 세번째 피해자가 도주한 것을 안 온보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진아씨를 강간한후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얼굴에 비닐 봉지를 씌운 뒤 삽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 내리쳐서 살해함. 9월 13일 새벽 5시 반. 서울 풍납동 지점에서 허양의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던 온보현의 모습이 cctv 에 찍혔으나, 밀수사의 폐혜로 김제경찰서에서 확보하고 있는 또 다른 cctv 화면속의 인물인
온보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지나감.
->9월 13일 밤8시. 첫번째 살인으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 강동구 천호동에서 귀가하는 노영선(19)을 납치. 같은방법으로 노양을 결박한 온보현은 경북김천까지 가서는 한 모텔로 노양을 데려감. 밤늦은 시간이라 주위의 시선도 없었지만, 노양이 워낙 말을 잘 들었기 때문에 용기를 얻어 다른 여성들과 달리 안락한 침실에서 성폭행하기로 마음을 먹음. 노양을 강간한 후 신분증을 꺼내 주소등을 확인한 온보현은 왠지 노양에게는 나쁜인상을 주기 싫어져 결국 노양을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는 '이상한 친절'을 베품.
-> 온보현은 노양(강간만 하고 집에 데려다준 여자)을 강간한 다음날인 9월 14일
저녁 9시경 송파구 가락동 길가에서 아동복지학교에서 고아들을 보육하고 기르는 교사박승연(24)을 태움. 박양은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으슥한 곳에 차를 세우자 강하게 항의했고, 온보현은 흉기를 꺼내 위협함.
그러나 박양은 주눅들지 않고 거세게 저항함. 온보현은 박양을 마구 찔러대다가 자신도 손에 큰상처를 입음. 온보현은 온몸을 찔려 피를 흘리고 탈진한 박양을 강간했고, 반항해서 손을 다치게 만든 분풀이로 다시 박양을 마구 찔러 살해함. 그리곤 박양의 지갑에서 현금14여만원을 꺼낸후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상북도 금능군 부근 도로변에 있는 지하통로입구에 사체를 던져 유기.
->이후 온보현은 박양의 저항에 다친 손을 치료하느라 추가범행을 못했을뿐만아니라 박양의 저항에 적지않은 두려움을 느껴 섣불리 범행을 재개하지 못한채 보름가까이 조용히 지냄.
그러나 9월 19일부터 지존파의 연쇄살인 이야기가 대대적으로 언론을 장식해 온보현에게도 범행에 대한 자극을 강하게 줌.
한편 권여인납치, 강도 강간 및 살인 미수 사건을 수사하던 전북김제 경찰서는 9월 15일 온보현에 대한 공개 지명 수배와 함께 공개수사 체제로 전환했고, 용산경찰서는 9월 23일에서야 현금자동 지급기 cctv에 찍힌 범인의 사진과 인상착의에 대한 공개수배.
-> 자기 나이만큼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계획으로 출발한 범행이었으나, 온보현은 무엇이든 계획을 세워 끝까지 실행해본 경험도 없었고 그런 능력도 없었음.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저지른 범행이 허술한 사회 감시망 덕에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었지만, 두번째 살인을 하다가 큰 부상을 입자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됨.
지존파 사건을 접하며 다시 범행 의지를 불태우려 애써 보았지만 한번 꺾인 자신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스스로 작성한 '살인일기'를 읽으며 자기 범행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느낌.
-> 9월 27일 온보현은 범행을 시작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살을 결심하고, 범행에 사용한 도구들과 피해자들에게 빼앗은 물건들, 그리고 살인일기를 챙겨들고 고향인 김제를 향해 택시를 운전하고 가다가 오후 7시 라디오에서 자신의 공개 수배 내용을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에 없던 호소력을 가지고 마음을 파고들자 잠시 차를 멈추고 살인일기를 꺼내 '지존파와 같은 대접을 받기 위해 지존파를 검거한 서초경찰서에 자수하러 간다'
는 심경을 기록. 자신을 수배한 김제.용산경찰서는 양에 안차고 지존파를 검거한것으로 유명해진 서초경찰서라야 자신의 범행을 제대로 밝혀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이라고 판단.
어린애처럼 유치한 영웅 심리를 가진 덜 떨어진 범인 온보현에게 무방비 상태로 농락 당한 한국사회와 경찰이 더욱 초라해 보인 일대의 사건
-> 온보현은 서초경찰서에 자수한 지 두달이 채 안된 1994년 11월 사형선고를 받음.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1년후인 1995년 11월 2일. 김기환 등 지존파 일등 6명 및 노인 연쇄살인범 지춘길 등과 같은 날 사형이 집행.
6.
막가파
'막가는 인생'이라는 뜻의 막가파는
96년 10월 지존파를 모방해 만들어졌다. 두목 최정수 등 조직원 9명은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모두 다 죽이고 싶었다"고 범행이유를
밝혔다.
96년 10월 경기도 광주시의 경찰 검문소는 도난 신고된 한 승용차를 검거했다. 차 안에는 5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빌린 차라고
주장했다. 이 번호판은 강남경찰서 관내에서
도난당한 것이라 검문소 경찰관은 이들을 곧 강남경찰서로
인계했다.
강남서 박모경위는 분명 이들이 여죄를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5인조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이모군(당시 17세)을 불러냈다.당시 도난차를 이용한 납치 사건이 빈발했었다.
박경위가 “너희들 사람 납치했지”라고 추궁하자 이모군은 “그렇다. 납치해서 죽였다”라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도 쉽게 시인하는 바람에 믿기지 않았으나, 이군이 말하는 범행 현장이 너무 구체적이라 형사계장과 함께 출동했다.
이군이 말한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의 한 염전 소금창고에 도착해 땅을 파자 사람의 어깨 맨살이 나왔다.
‘어 진짜네!’ 계속 땅을 파들어가자 알몸의 40대 여성 사체가 나왔다.
시체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로 꼿꼿이 서있었다. 죽은 사람을 선 자세로 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혹시나 싶어 이군을 추궁하자, “산 채로 매장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땅을 너무 얕게 파서 머리는 옆으로 꺾어 흙을 덮었다”고 진술했다.
이군 등은 조직폭력배 조양은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보스’를 보고 막가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영화를 보고 ‘배신하는 자는 죽인다’ ‘화끈하게 살다가 멋있게 죽는다’는 등의 강령을 만들고
‘막가는 인생’이라는 뜻으로 막가파를 만들었다.
막가파는 부녀자를 납치해 돈을 뺏거나 취객(醉客)을 때려 실신시킨 다음 돈을 터는 ‘아리랑치기’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해 10월2일 새벽 2시쯤 막가파는 서울 신사동 도로에서 일제 혼다 승용차를 혼자 몰고 가는 여성(피해자)을 발견하고 포이동에 있는 집까지 따라갔다.
3일 후인 10월5일 새벽 2시경 이들은 포이동의 이 여자 집 앞에서 기다리다, 여자가 귀가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어 납치했다. 그리고는 금품을 뺏고 소금창고로 끌고 가 생매장했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10월17일에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 제목 그대로 연속해서 3건의 주유소 습격 강도 행각을 벌였다. 새벽 3시쯤 이들은 경기도 광주군 한 주유소 사무실에 침입해 야구방망이로 종업원을 때려 눕히고 14만원을 강취했다. 그리고는 새벽 4시50분경 서울로 올라와 양재동의 한 주유소에 침입해 같은 방법으로 70만원을 털었다.
그로부터 50분 뒤인 새벽 5시40분에는 분당의 한 주유소에 들어가 종업원들에게 회칼을 들이대고 93만원을 강탈했다. 막가파는 이런 행각을 남자다운 짓으로 생각하고 범행한 것이었다...
강남서 박모경위는 분명 이들이 여죄를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5인조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이모군(당시 17세)을 불러냈다.당시 도난차를 이용한 납치 사건이 빈발했었다.
박경위가 “너희들 사람 납치했지”라고 추궁하자 이모군은 “그렇다. 납치해서 죽였다”라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도 쉽게 시인하는 바람에 믿기지 않았으나, 이군이 말하는 범행 현장이 너무 구체적이라 형사계장과 함께 출동했다.
이군이 말한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의 한 염전 소금창고에 도착해 땅을 파자 사람의 어깨 맨살이 나왔다.
‘어 진짜네!’ 계속 땅을 파들어가자 알몸의 40대 여성 사체가 나왔다.
시체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로 꼿꼿이 서있었다. 죽은 사람을 선 자세로 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혹시나 싶어 이군을 추궁하자, “산 채로 매장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땅을 너무 얕게 파서 머리는 옆으로 꺾어 흙을 덮었다”고 진술했다.
이군 등은 조직폭력배 조양은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보스’를 보고 막가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영화를 보고 ‘배신하는 자는 죽인다’ ‘화끈하게 살다가 멋있게 죽는다’는 등의 강령을 만들고
‘막가는 인생’이라는 뜻으로 막가파를 만들었다.
막가파는 부녀자를 납치해 돈을 뺏거나 취객(醉客)을 때려 실신시킨 다음 돈을 터는 ‘아리랑치기’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해 10월2일 새벽 2시쯤 막가파는 서울 신사동 도로에서 일제 혼다 승용차를 혼자 몰고 가는 여성(피해자)을 발견하고 포이동에 있는 집까지 따라갔다.
3일 후인 10월5일 새벽 2시경 이들은 포이동의 이 여자 집 앞에서 기다리다, 여자가 귀가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어 납치했다. 그리고는 금품을 뺏고 소금창고로 끌고 가 생매장했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10월17일에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 제목 그대로 연속해서 3건의 주유소 습격 강도 행각을 벌였다. 새벽 3시쯤 이들은 경기도 광주군 한 주유소 사무실에 침입해 야구방망이로 종업원을 때려 눕히고 14만원을 강취했다. 그리고는 새벽 4시50분경 서울로 올라와 양재동의 한 주유소에 침입해 같은 방법으로 70만원을 털었다.
그로부터 50분 뒤인 새벽 5시40분에는 분당의 한 주유소에 들어가 종업원들에게 회칼을 들이대고 93만원을 강탈했다. 막가파는 이런 행각을 남자다운 짓으로 생각하고 범행한 것이었다...
7. 영웅파
99년 10월29일 대전지검은 동료 조직원을 살해하고
시체장기의 일부를 꺼내 나눠 먹은 뒤 암매장한 혐의(살인 및 사체오욕, 유기, 증거인멸)로 정모씨(29. 모전문대학 1학년) 등 일명 `‘영웅파’ 조직폭력배
6명을 구속했다. 대전지검 특수부(부장검사 이재원)는 동료 조직원을 살해하고 시체장기의
일부를 꺼내 나눠 먹은 뒤
암매장한 혐의(살인
및 사체오욕, 유기, 증거인멸)로 정모씨(29. 공주 모전문대학 1학년) 등 일명 `‘영웅파’ 조직폭력배
6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평소 불신이 깊었던 같은 조직원을 하극상을 했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한 뒤 뼈와 살을 분리하고 암매장하기 전 `‘무덤에 갈 때까지 이 같은 사실을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다’는 서약의 표시로 동료의 시신에서 장기의 일부를 꺼내 나눠 먹는 엽기적 범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이러한 반인륜적인 사건의 주범이 대학생이자 교내·외에서 범죄 추방을 위한 사설 모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는 점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충격을 남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 등은 동년 10월 22일 대전시 서구 탄방동 모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같은 조직원인 곽모(29)씨가 선배의 동거녀(24)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데 앙심을 품고 곽씨를 폭행했다가 곽씨가 기절하자 승용차에 싣고 자신들의 합숙소인 대전시 서구 도마 2동 소재 2층 단독주택으로 데려 왔다.
이들은 곽씨가 깨어나면 자신들이 보복 당할 것을 우려해 같은 날 오전6시경 야구방망이와 회칼, 쇠망치 등으로 곽씨를무참히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어 회칼 3개를 이용해 집 목욕탕에서 뼈와 살을 따로 떼어내 토막을 내고 지문까지 없앤 뒤 `이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자'며 사체에서 간을 꺼내 소주를 마시며 안주대용으로 모두 나눠 먹는 전대미문의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
검찰 조사결과 이들은 증거인멸 등에 함께 가담한 혐의로 함께 구속된 같은 조직원 이씨의 동거녀 강모씨(24)에게도 이를 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완전히 훼손된 시체를 쓰레기 봉투 11개에 나눠 담은 뒤 승용차에 다시 싣고 이날 오후 3시경 대전시 유성구 성북동 산림욕장 부근 야산 계곡에 3개의 웅덩이를 파고 시체를 나눠 암매장했다.
검찰은 이들의 진술에 따라 28일 오후 6시경 이 야산에서 살해된 곽씨의 시체를 찾아냈다.
이들은 평소 불신이 깊었던 같은 조직원을 하극상을 했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한 뒤 뼈와 살을 분리하고 암매장하기 전 `‘무덤에 갈 때까지 이 같은 사실을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다’는 서약의 표시로 동료의 시신에서 장기의 일부를 꺼내 나눠 먹는 엽기적 범행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이러한 반인륜적인 사건의 주범이 대학생이자 교내·외에서 범죄 추방을 위한 사설 모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는 점은 앞으로도 적지 않은 충격을 남길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정씨 등은 동년 10월 22일 대전시 서구 탄방동 모편의점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중 같은 조직원인 곽모(29)씨가 선배의 동거녀(24)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데 앙심을 품고 곽씨를 폭행했다가 곽씨가 기절하자 승용차에 싣고 자신들의 합숙소인 대전시 서구 도마 2동 소재 2층 단독주택으로 데려 왔다.
이들은 곽씨가 깨어나면 자신들이 보복 당할 것을 우려해 같은 날 오전6시경 야구방망이와 회칼, 쇠망치 등으로 곽씨를무참히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어 회칼 3개를 이용해 집 목욕탕에서 뼈와 살을 따로 떼어내 토막을 내고 지문까지 없앤 뒤 `이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자'며 사체에서 간을 꺼내 소주를 마시며 안주대용으로 모두 나눠 먹는 전대미문의 엽기적 행각을 벌였다.
검찰 조사결과 이들은 증거인멸 등에 함께 가담한 혐의로 함께 구속된 같은 조직원 이씨의 동거녀 강모씨(24)에게도 이를 먹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완전히 훼손된 시체를 쓰레기 봉투 11개에 나눠 담은 뒤 승용차에 다시 싣고 이날 오후 3시경 대전시 유성구 성북동 산림욕장 부근 야산 계곡에 3개의 웅덩이를 파고 시체를 나눠 암매장했다.
검찰은 이들의 진술에 따라 28일 오후 6시경 이 야산에서 살해된 곽씨의 시체를 찾아냈다.
곽씨는 1m깊이의 흙 속에 묻혀 있었으나 뼈와 살이 따로 흩어져 있고
흉기로 완전히 난도질을 당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이 시체가 곽씨가 맞는 지의 여부를 조사중이다.
검찰은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이 시체가 곽씨가 맞는 지의 여부를 조사중이다.
정씨 등은
검찰에서 “곽씨가 평소 선배에 반말을 하는 등 불손한 태도를 보여 `언젠가 손을 봐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이날 선배의 동거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해 살해했다”고 범행동기를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범행동기에 비해 이들의 살해방법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고 장기의 일부를 나눠 먹은 점 등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정확한 범행동기를 계속 추궁 중이다.
검찰은 또 살인전과 등이 있는 이들이 2개월 전부터 이 단독주택 1층을 세내 함께 합숙하며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녔고 `보험사기와 청부폭력을 일삼아왔다'는 첩보에 따라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계속 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검찰은 범행동기에 비해 이들의 살해방법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고 장기의 일부를 나눠 먹은 점 등 진술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정확한 범행동기를 계속 추궁 중이다.
검찰은 또 살인전과 등이 있는 이들이 2개월 전부터 이 단독주택 1층을 세내 함께 합숙하며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녔고 `보험사기와 청부폭력을 일삼아왔다'는 첩보에 따라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계속 수사를 벌이기로 했다.
암매장 장소
동료 조직원 곽모(29)씨를 살해 한 뒤 장기의 일부를 나눠 먹은 혐의로 검찰에 긴급체포된 조직폭력배 「영웅파」 정모(29)씨 등조직원들이
시체를 암매장한 현장은 대전시 유성구 성북동 산림욕장 부근 인적이 드문 야산 계곡이었다.
곽씨의 시체는 성북동 산림욕장 입구에서 야산 정상 부근까지 1.5㎞ 정도 떨어진 도로에서 계곡 쪽으로 20여m
아래 떨어진 곳 10여m 사이 3개 구덩이에 매장됐다.
28일 밤 시체를 발굴한 검찰에 따르면 토막낸 시체의 살만 파묻은 첫 번째 구덩이는 지름 70㎝, 깊이 80㎝ 정도로 아직 시체 썩은 냄새가 가시지 않아 파리떼가 주위에 들끓었다.
이 구덩이에서 아래 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지름 50㎝, 깊이 30㎝ 정도의 구덩이 2개가 나란히 있었으며
검찰은 여기에서 시체의 머리와 뼈를 각각 수습했다.
성북동 산림욕장 관리소 직원에 따르면 암매장한 현장을 지나는 도로는 가로등이 없고 포장도 안된 산길로 평소
낮시간에만 3-4대 정도의 차량만 지나갈 뿐 밤에는 차량 통행이 없다는 것.
더욱이 현장 근처의 산림욕장은 지난 95년 유성구에서 조성한 것으로 논산 방면국도에서 산쪽으로 10여 ㎞ 떨어진 곳에 위치해 평일에는 찾는 사람이 없고 주말에만 수십명 정도 찾아 올 뿐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이들은 이미 이곳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료 곽씨 살해 이전 이곳을 답사했을 가능성이 높아 곽씨 살해가 단순히 「선배를 무시하고 평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데 앙심을 품었다는」 뱀행 동기는 설득력이 없는등 보다 절박한 다른 이유로 사전 공모에 의해 범행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높게 하고있다.
8.
유영철
유영철(柳永哲, 1970년 4월 18일 ~)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여사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 되어 이문동 전위선 양 살인사건을 제외한 20명 살인범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2005년 6월 9일 대법원은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였다. 이후에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이 다른 연쇄살인범인 정남규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고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은 가장 최근인 1997년 12월 30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중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로도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2007년 12월 30일 비공식적인 사형 폐지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유영철 원룸)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주로 서울 지역에서 유영철이 21명의 부유층 노인과 여성들을 망치나 칼 등 각종 잔혹한 방법을 이용해 부유층에 대한 불만과 이혼한 뒤에 느낀 여성에 대한 혐오증 때문에연쇄적으로 살인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이래, 총 14차례의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의 혐의로 11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한 30대 중반의 남성 유영철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다.
유영철은 1991년 안마사와 결혼하였으나, 2002년 5월 무렵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부터 여성 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 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003년 11월에는 전과자 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교제 중이던 여성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막연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쇄살인의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의 단독주택에서 행해진 대학교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이다. 이후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잇달아 살해하였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21명이다. 유영철 자신은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데, 2004년 8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으로, 범행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범행 수법이 과감하면서도 치밀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하였다. 또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 내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2004년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 되어 이문동 살인 사건을 제외한 범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2005년 6월 9일 대법원은 유영철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후에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이 다른 연쇄살인범인 정남규라는 사실이 밝혀 졌다.
9.
정남규
정남규(1969년 3월 1일 ~ )는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3명의 시민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2004년 1월, 경기도 부천시에서 윤기현 군(11세)과 임영규 군(10세)을 납치 살해하는 등, 경기도와 서울 일대(주로 서남부 지역)를 돌아다니며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주지에 침입하여 살인과 방화를 함께 저지르는 등 연쇄살인 행각을 벌여 당시 언론에서는 '서울판 살인의 추억' , '비오는 목요일밤의 괴담'이라는 등 다소 선정적인 보도를 했다.
2006년 4월 22일에 체포되었으며, 자백에 의해 유영철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던 이문동 전위선 양 살인 사건의 진범임이 밝혀졌다. 2006년 6월 7일에 구속 기소되어, 9월 21일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2007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나,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사형은 단 한건도 집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정남규(37)는 2004년 2월 서울 이문동에서 행인 전모씨(27)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등 2004년 1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모두 24건의 강도상해 및 살인 등을 저질러 13명을 숨지게 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과 2심에서 각각 사형을 선고 받았다.
10. 그 밖의
살인자들
지춘길 사건해방
직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경상북도와 대구 일대에서 고아로 자란 지춘길(당시 47세)은 구걸하거나 훔쳐야 먹고 살 수 있는 '거리의 법칙'에
길들여졌다. 열일곱 살이 돼던 1960년, 특수 절도 혐의로 소년원에 수감됀 것을 시작으로 모두 15차례에 걸쳐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는 등
청소년기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냈다.
1990년 초 마흔일곱 살의 나이로 출소한 지춘길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술도 없고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취직도 어려운 것은 물론, 가족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지춘길은 사회 저명 인사와 국회의원, 고관대작 등을 살해해서 복수하고, 이 사실을 세상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뜻을 같이할 동지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공범을 찾지 못한 데다 혼자서는 고위층에게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자 공격 대상을 수정했다. 과거 김대두가 그랬듯, 처음 의도와는 달리 자신보다 더 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외딴집 노인들을 찾아나선 지춘길은 군사 시설이 아닌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을 공격하는 '비겁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지춘길은 이미 작정한 대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엉뚱한 시민들에게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1990년 3월 7일 새벽 1시, 경북 안동 산골의 외딴집을 찾았다. 그리고 혼자 잠들어 있던 할머니(62세)를 깨워서 상스런 욕을 퍼부은 다음 방안에 있던 끈으로 양손을 결박하고 이불을 덮어씌운 뒤 할머니 몸 위로 장롱을 넘어뜨려 눌러버렸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이불에 불을 붙였고 곧 집 전체가 불에 타 무너져버렸다.
3개월이 지난 6월 16일 새벽 1시, 10년 가까이 갇혀 지내던 경북 청송감호소 인근 외딴집을 찾아 안동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혼자 사는 할머니(67세)를 살해하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다.
역시 3개월이 지난 9월 27일 밤 8시, 다시 안동을 찾아 외딴집으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없자 불을 질러 집을 다 태워버렸다. 불은 질렀으나 살인은 하지 못해 성이 안 차자 보름 만에 다시 안동 외딴집을 찾았고, 혼자 사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금반지 2개를 뺏은 후 이불을 덮고 그 위에 장롱을 넘어뜨려 짓누른 뒤 불을 붙였다.
살인과 방화에 중독됀 나머지 5일 만에 다시 범행에 나섰다. 이번에는 각자 혼자 사는 할머니 셋이 모여 자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위협해 손과 발을 묶은 다음 부엌에 있던 LPG통을 옮겨와 할머니들 옆에 놓고 불을 붙였는데, 얼마 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고 그 충격은 30미터 떨어진 마을의 전기와 수도가 끊길 정도였다.
보름 후인 11월 2일 밤 8시, 다시 범행에 나섰지만 상황이 전과 많이 달랐다. 외딴집에는 건장한 6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네 분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춘길은 놀란 나머지 흉기를 마구 휘둘러댔다.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할아버지가 신고했고, 지춘길은 겁을 먹고 황급히 달아나다 빈집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일대에서 5건의 살인 방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 터라 경찰은 최대한의 인력을 현장에 급파하여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 다음날 새벽 2시 반경, 숲 속과 덤불, 노적가리, 빈집 등 범인이 은신할 만한 곳을 이 잡듯 뒤지던 경찰은 폐허가 됀 빈집의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를 발견, 격투 끝에 검거했다. 지춘길의 빗나간 분풀이 살인 행각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지춘길은 검거됀 뒤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가 1심 공판에서 진술을 번복하고 범행을 부인했지만 유죄를 인정받아 대법원에서 노인 6명 살인 및 방화, 4명 중상해가 모두 인정돼어 사형이 언도돼었다. 1995년, 지춘길은 지존파 일당 6명 및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온보현과 함께 사형이 집행돼었다.
황영동 사건
1998년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칼로 여성을 위협하여 강간한 혐의(특수 강간)로 수원 중부서에 구속돼었다가 검찰에 송치됀 후 두 눈에 녹내장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난 40대 범인이 대전으로 가서 임신부와 60대 할머니를 포함한 5명의 여성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더구나 범인 황영동(당시 49세)은 강간 등 전과 14범인 상습 흉악범이었다. 그런 범인을 아무런 감시 조치 없이 거리로 내보낸 검찰과 법원의 판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황영동은 미혼이었고 일자리도 변변치 않고 가족도 없는 외톨이였다. 8월 13일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났지만 갈 데도 없고 치료는 커녕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도 없어 병원에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였다. 1972년 군복무 도중 탈영해 3년간 복역한 뒤부터 모두 14차례에 걸쳐 19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터라 범죄 말고는 아는 것도 없고, 교도소 말고는 친숙한 곳도 없었다.
결국 강도짓이라도 해서 돈을 마련하겠단 생각에 칼을 들고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만 골라 칼로 위협해 돈을 뺏고 강간한 다음 온몸을 마구 찔러 살해했다. 그렇게 4명이나 살해하고도 모자라 10월 16일 밤 9시 반, 식당에서 고기와 술 등 6만원 어치를 먹은 뒤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임신 6개월의 여주인을 칼로 마구 찌르고 도주했다.
다시 수원으로 올라온 황영동은 10월 23일, 수원 장안구의 한 공중 화장실에서 무용 강사(46세)를 성폭행하다가 지나던 시민들에게 붙잡혔고, 수원 중부서에서는 다시 황영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행적을 알아냈고,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 중이던 대전 동부서에 공조 수사를 요청해 범행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그 해 겨울, 황영동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돼었고 현재 복역중이다.
1990년 초 마흔일곱 살의 나이로 출소한 지춘길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가진 자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게다가 기술도 없고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취직도 어려운 것은 물론, 가족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지춘길은 사회 저명 인사와 국회의원, 고관대작 등을 살해해서 복수하고, 이 사실을 세상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뜻을 같이할 동지를 찾아나섰다. 하지만 공범을 찾지 못한 데다 혼자서는 고위층에게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자 공격 대상을 수정했다. 과거 김대두가 그랬듯, 처음 의도와는 달리 자신보다 더 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외딴집 노인들을 찾아나선 지춘길은 군사 시설이 아닌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을 공격하는 '비겁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지춘길은 이미 작정한 대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엉뚱한 시민들에게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1990년 3월 7일 새벽 1시, 경북 안동 산골의 외딴집을 찾았다. 그리고 혼자 잠들어 있던 할머니(62세)를 깨워서 상스런 욕을 퍼부은 다음 방안에 있던 끈으로 양손을 결박하고 이불을 덮어씌운 뒤 할머니 몸 위로 장롱을 넘어뜨려 눌러버렸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이불에 불을 붙였고 곧 집 전체가 불에 타 무너져버렸다.
3개월이 지난 6월 16일 새벽 1시, 10년 가까이 갇혀 지내던 경북 청송감호소 인근 외딴집을 찾아 안동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혼자 사는 할머니(67세)를 살해하고 그 집을 불태워 버렸다.
역시 3개월이 지난 9월 27일 밤 8시, 다시 안동을 찾아 외딴집으로 들어갔으나 아무도 없자 불을 질러 집을 다 태워버렸다. 불은 질렀으나 살인은 하지 못해 성이 안 차자 보름 만에 다시 안동 외딴집을 찾았고, 혼자 사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의 금반지 2개를 뺏은 후 이불을 덮고 그 위에 장롱을 넘어뜨려 짓누른 뒤 불을 붙였다.
살인과 방화에 중독됀 나머지 5일 만에 다시 범행에 나섰다. 이번에는 각자 혼자 사는 할머니 셋이 모여 자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위협해 손과 발을 묶은 다음 부엌에 있던 LPG통을 옮겨와 할머니들 옆에 놓고 불을 붙였는데, 얼마 후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고 그 충격은 30미터 떨어진 마을의 전기와 수도가 끊길 정도였다.
보름 후인 11월 2일 밤 8시, 다시 범행에 나섰지만 상황이 전과 많이 달랐다. 외딴집에는 건장한 60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네 분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춘길은 놀란 나머지 흉기를 마구 휘둘러댔다. 몸싸움을 하는 와중에 할아버지가 신고했고, 지춘길은 겁을 먹고 황급히 달아나다 빈집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일대에서 5건의 살인 방화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 터라 경찰은 최대한의 인력을 현장에 급파하여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다. 다음날 새벽 2시 반경, 숲 속과 덤불, 노적가리, 빈집 등 범인이 은신할 만한 곳을 이 잡듯 뒤지던 경찰은 폐허가 됀 빈집의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를 발견, 격투 끝에 검거했다. 지춘길의 빗나간 분풀이 살인 행각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지춘길은 검거됀 뒤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가 1심 공판에서 진술을 번복하고 범행을 부인했지만 유죄를 인정받아 대법원에서 노인 6명 살인 및 방화, 4명 중상해가 모두 인정돼어 사형이 언도돼었다. 1995년, 지춘길은 지존파 일당 6명 및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범인 온보현과 함께 사형이 집행돼었다.
황영동 사건
1998년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칼로 여성을 위협하여 강간한 혐의(특수 강간)로 수원 중부서에 구속돼었다가 검찰에 송치됀 후 두 눈에 녹내장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난 40대 범인이 대전으로 가서 임신부와 60대 할머니를 포함한 5명의 여성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더구나 범인 황영동(당시 49세)은 강간 등 전과 14범인 상습 흉악범이었다. 그런 범인을 아무런 감시 조치 없이 거리로 내보낸 검찰과 법원의 판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황영동은 미혼이었고 일자리도 변변치 않고 가족도 없는 외톨이였다. 8월 13일 구속 집행 정지로 풀려났지만 갈 데도 없고 치료는 커녕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도 없어 병원에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처지였다. 1972년 군복무 도중 탈영해 3년간 복역한 뒤부터 모두 14차례에 걸쳐 19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터라 범죄 말고는 아는 것도 없고, 교도소 말고는 친숙한 곳도 없었다.
결국 강도짓이라도 해서 돈을 마련하겠단 생각에 칼을 들고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만 골라 칼로 위협해 돈을 뺏고 강간한 다음 온몸을 마구 찔러 살해했다. 그렇게 4명이나 살해하고도 모자라 10월 16일 밤 9시 반, 식당에서 고기와 술 등 6만원 어치를 먹은 뒤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임신 6개월의 여주인을 칼로 마구 찌르고 도주했다.
다시 수원으로 올라온 황영동은 10월 23일, 수원 장안구의 한 공중 화장실에서 무용 강사(46세)를 성폭행하다가 지나던 시민들에게 붙잡혔고, 수원 중부서에서는 다시 황영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행적을 알아냈고,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 중이던 대전 동부서에 공조 수사를 요청해 범행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그 해 겨울, 황영동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돼었고 현재 복역중이다.
[My Chemical Romance]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naver.com/mercurian21?Redirect=Log&logNo=3004197905556명을 죽이다니... 진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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